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창룡(군인) (문단 편집) == 기타 == * 원래 일제강점기의 스파이 양성학교인 나카노 학교를 나왔다는 말이 있다.[[http://www.sedaily.com/NewsView/1OM9HDLII7|#]] * 안양 [[관악산]] 묘역에 있던 그의 비석은 [[정일권]]이 세웠으며 비문은 [[이병도]]가 썼다. 이병도는 조문에 '그 사람됨이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또 불타는 조국애와 책임감은 공사를 엄별하여 직무에 진수하더니 급기야 그 직무에 죽고 말았다'라고 적기도 했다. 1998년 국립대전현충원 이장 당시 규격화된 둘레석 및 묘비만 설치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장군묘역에서 300~400m 떨어진 연못이 있는 빈 터에 세웠지만 현충원 이장 반대 여론이 점차 형성된 2001년 3월에 유족 측이 인수해서 아무도 모르게 가져갔다. 이것을 정지환 <시민의신문>[* 1993년에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시민주를 투자해서 창간한 재야 신문으로, 2006년에 이형모 당시 대표의 성추행 사건을 계기로 내홍을 겪다가 2007년에 [[https://m.hani.co.kr/arti/society/ngo/210756.html#cb|폐간됨]]. 반면 구 시민의신문 직원들은 <시민사회신문>을 새로 창간했다.] 기자가 2003년에야 충남 금산군 추부면 승마장 구석에서 찾아내 [[http://www.okinews.com/bbs/list.html?table=bbs_1&idxno=7594&page=527&total=10582&sc_area=&sc_word=|특종으로 보도하였다]].[* 해당 사례는 정지환이 2004년에 쓴 저서 <대한민국 다큐멘터리(인물과사상사 刊)>에도 나온다.] * 죽고 나서 경기도 안양시 석수1동 산33-1 관악산 기슭의 약 1천여 평짜리 땅에 묻혔는데 안두희 증언이 이슈화되던 1992년 <한겨레신문>을 통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2062600289115002&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2-06-26&officeId=00028&pageNo=15&printNo=1271&publishType=00010|존재가 재조명되었고,]] 1998년 2월 13일 국군기무사령부의 지원으로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1묘역에 이장된 후 2001년 <동아일보>를 통해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0/0000044499?sid=100|이장 사실이 처음 알려져]] 점차 여론화되면서 이에 대해 찬반논란이 계속되고 있으며 관련 집회가 있을 때마다 경찰이 출동할 정도로 현충원에서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36542|#]] 그럼에도 현행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7조 1항에서 유족이 이장을 요청하지 않는 한은 불가능하며 대전현충원 이장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김창룡이 '[[반공]]투사'였다는 이유를 들어 극찬하고 칭송했다. 그의 유족들도 ''공산화를 막기 위해 제일 공헌을 많이 했다.' '민간인을 많이 죽였단 것은 헛소문이고 [[이승만]] 대통령을 도와 공산화를 막기 위해 제일 공헌한 분'이란 발언을 하기도 했다.[[http://v.entertain.media.daum.net/v/20170819235214948?f=m|#]] 심지어 [[뉴데일리]]에서는 김창룡의 행적을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80809|확대 과장해서]] 선전하고 있다. 특히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국립대전현충원 앞에서 '김창룡은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를 비호한 반민족 행위자'라는 내용의 전단지를 배포했고 이를 <한겨레>, <대전일보>, <중도일보> 등에서 보도하자 김창룡의 장녀 김미원이 민문연과 대전지부장 이규봉(당시 배재대학교 교수), <한겨레> 등 언론사들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1억 5천만원 가량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걸었다가[* 김미원 측은 안두희가 1992년 당시 "조선호텔 앞 대륙상사로 위장된 특무대 사무실에서 만나 백범 암살을 지시받았다"고 증언했는데 암살 시점인 1949년 당시에는 특무대 자체가 없었으며 당시 생존한 사건 관계자들도 '김창룡의 지시는 말이 안된다' 고 했다고 하며 그 근거를 밝혔다.[[https://www.minjok.or.kr/archives/64547|#]]] 2006년 3월 김미원이 사망하면서 아내 도상원이 원고 자격을 승계받아 진행했으나, 2007년 법원 측은 민문연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https://m.mt.co.kr/renew/view.html?no=2007091216282189362|#]] 2014년 현충일에는 진보단체인 [[서울의소리]]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jCeVj732yho|김창룡 묘 파묘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 그가 죽자 아내 도상원은 홀로 슬하 1남 3녀를 키웠으며 세인의 지탄을 받다 못해 1971년 말 [[브라질]] 상파울루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408210020920400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4-08-21&officeId=00020&pageNo=4&printNo=16274&publishType=00020|이민갔다가]] 아내는 1990년대 이후 귀국해 대전에 정착했다. 자식들 중 장녀 김미원은 아버지의 명예회복에 평생을 매진했으며 1995년 드라마 <김구> 제작진,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등을 각각 고소하며 법적 투쟁을 벌이다 2006년 3월 사망했고, 외아들은 여전히 브라질에 거주 중이다. 반대로 그의 친일 행적에 비해 장인어른 도정호(1903~1930)는 [[독립유공자]]이며 항일투쟁을 하다 옥사하였다.[[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1/06/01/2011060100083.html|#]] * 한반도에서 최초로 축구 야간경기를 연 기록도 갖고 있다. 1954년 전국체전에서 있었던 일인데, 본인의 팀이 유리한 상황에서 경기종료 3분을 앞두고 그라운드가 어두워지자 스무 대의 지프차를 불러 라이트를 켜고 경기를 속행시킨게 시초였다. 그런데 이마저도 그라운드를 제대로 비추지 못했고 결국 심판이 도망가는 바람에 재경기를 치러야 했다. 윗 문단의 김현회 칼럼 참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