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창룡(군인)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및 광복 직후 === 김창룡은 1916년 7월 18일[* 공식 기록은 1920년이지만 본인 기록으로는 1916년생이라고 되어있다.] [[함경남도]] 영흥군 요덕면 인상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그리 풍족하지 않았다. 10살이 되던 해 덕성사립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영흥공립농잠실습학교에서 [[누에나방|누에]]를 키우고 실을 뽑는 기술을 배우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직물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나 2년 만에 회사를 나와서 만주철도 [[창춘역|신경역]] 직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2년 만에 철도 직원을 그만두고 일본인의 추천을 받아 만주 주둔 일본 육군 헌병 [[군무원|군속]]으로 일하게 된다. 3년 동안 군속으로 온갖 노력을 기울인 끝에 1941년 4월 일본 [[관동군]] 소속 헌병 교습소에 입소했고, 교습소를 수료한 후 1941년 10월 [[따까리|육군 헌병보조원]]이 됐다. 그의 업무는 [[소련]]과 [[만주국]] 국경지역에서 항일 인사를 감시하는 일을 맡았다. 사복을 입고 주요 인물들을 탐색하고 접근하는 것이 주로 그가 한 일이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임무 수행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예를 들면 [[중국공산당]]의 거물 [[왕진리]](王近禮)를 체포할 때 그는 [[중국]]인 거지로 위장해 왕진리의 가게 종업원으로 일하게 된다. 그는 왕진리의 신임을 사기 위해 경찰서 유치장을 7번이나 드나들었다. 덕분에 왕진리와 주변 중국인들조차 그를 ''''진짜 중국 사람''''으로 인식했다. 일제는 그의 활약으로 왕진리를 검거했을 뿐만 아니라 왕진리와 관련된 9개 항일 지하조직을 색출하고 50여 명을 검거했다. 이때가 1943년이었다. 그의 활약에 탄복한 일제는 바로 육군 헌병 오장으로 특진시켰다. 그 이후에도 그는 1943년 9월부터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까지 '''불과 2년 사이에 무려 50여 개의 항일 조직을 적발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사복으로 갈아입고 바로 고향인 [[영흥]]으로 돌아왔다. 이때 영흥에서 [[소련군]]에게 친일부역 혐의로 체포당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탈출했고, 이후 다른 지역을 전전하다 다시 친일 혐의로 체포돼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거듭 탈출에 성공했다고 한다. 2차례 친일파로 체포됐기에 그는 한반도 이북지역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38선]]을 넘어 [[월남]]해 서울로 왔다. [[도시전설]]에 의하면 하도 얻어터져서 폐인이 된 모습으로 넘어와 [[미군]] 경비병들이 놀랐다고 한다. 서울에서도 그는 마땅한 일을 찾지 못해 전전하던 중 마침 [[만주군]]에서 안면이 있던 박기병을 만나게 된다. 당시 [[제3보병연대|3연대]]에서 [[소대장]]으로 복무하던 박기병은 그를 [[조선경비대|국방경비대]] [[제5보병연대|5연대]] 일반 사병으로 입대시켜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병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다시 박기병을 찾아간 그는 3연대에서 정보하사관으로 복무했다. 그러던 중 [[만주군]] [[대위]] 출신인 [[김백일]]의 추천으로 1947년 1월 [[군사영어학교|조선경비사관학교]][* 현재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이다.] 3기로 입교해 그해 4월 [[소위]]로 임관했다. 이런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인물이 [[광복군]] 출신의 [[이성가]] 제1연대장(당시 소령)이었다. 우익 성향의 [[이성가]]는 중국에서 [[국민혁명군]] 소속일 때도 [[남의사]]에서 활동하며 곳곳에 암약하는 공산주의자를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했다. 그는 제1연대 내의 공산주의자를 솎아내기 위해 김창룡을 연대 정보주임 보좌관으로 발탁하고 정보소대 지휘를 맡긴다. 여기서 김창룡은 그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이병주]] 소령[* 참고로 이병주는 [[박정희]]와 [[만주국육군군관학교]] 동기생으로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이병주]]가 먼저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남로당]]에 가담했고, [[박정희]]도 그 영향을 받아 [[남로당]]과 연을 맺게 되어 숙군의 홍역을 치른다.]을 비롯한 연대 내 좌익 장병들을 대거 색출해냈다. 이후 [[여수·순천 10.19 사건|여순 반란 사건]]을 계기로 숙군 작업이 본격화되고, [[반공]]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면서 김창룡에게는 출세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투철한 [[반공]] 이미지를 보이기 위한 오버스러운 행동에 대한 일화도 많다. 1947년 5월, 당시 서울에는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 경비병력으로 소수의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때 김창룡은 한 소련 군인이 사진을 찍는 모습을 발견했다. 김창룡은 격투 끝에 소련 군인을 제압하고 필름을 압수했다. [[미소공동위원회]]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소련은 난처해졌다. 미국은 소련 측에게 '정탐을 하러 왔느냐'고 따졌고, 김창룡의 이 행동은 군 수뇌부의 주목을 받아서 1948년 1월 [[중위]]로 진급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