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창룡(군인) (문단 편집) ==== [[여수·순천 10.19 사건]] 당시 숙군 및 [[김구]] 암살 관여 ==== 이후 김창룡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더불어 [[대위]]로 진급했다. 8월 말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국]]에 배속됐다. 그러던 중 1948년 10월 [[여수·순천 10.19 사건]]이 일어났다. 여순사건 직후 [[이승만]]은 대대적인 [[숙군]][* 군대 내 반체제 인사를 숙청하는 것.]을 지시했다. 1946년 국군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사실 군대의 '[[진입장벽]]'이 낮았다. 영어 한 마디만 할 줄 알면 장교가 될 수 있었고, 추천서 한 장이면 요직에도 손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당장 군대를 육성하는 것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일본군 출신들도 쉽게 군에 들어갈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좌익]] 계열도 어렵지 않게 군에 들어갈 수 있었다. || [[파일:여순사건 당시 숙청당하는 군인들.jpg|width=100%]] || || 숙청당하는 군인들. || 1948년 10월, [[여수·순천 10.19 사건]]으로 14연대가 통째로 반란을 일으키자 이승만은 [[군법무관]]이었던 [[김완용]]에게 "한 달 내로 [[빨갱이]]들을 다 잡아 죽이고 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때 김창룡이 실무자로 있던 육군 정보국 3과인 [[방첩기관|방첩과]]가 나섰다. 1948년 11월 11일 김창룡과 정보 요원들은 '''[[박정희]] 당시 소령을 체포하고 심문했다. 박정희가 체포됨으로써 군대 내 세력을 확장하던 [[남조선로동당]] 조직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949년 3월까지 방첩과는 불과 4개월 동안 1,500명에 달하는 이를 숙청했다. 당시 군 병력의 3%에 해당하는 엄청난 인원이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 안에 실적 쌓기식 숙청이 됐기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 '''대부분의 경우 증거보다 자백을 받아내는 식으로 심문을 했고, 고문이 혹독하게 가해졌다.''' 자백을 한 뒤에는 연루된 좌익 인물을 대라고 또다시 고문이 이어졌다. 이 같은 방식으로 애매하게 숙청되는 인물이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최남근]] 중령은 남한 정부를 전복할 목적으로 동지들을 규합했다는 죄명이 씌워졌다. 최남근은 처형당할 때 [[애국가]]를 부르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자신이 억울하다는 것을 마지막까지 항변한 것이다. 당시 숙군 작업으로 처형된 사람 가운데서는 이처럼 애국가를 부르거나,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거나, 심지어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외치면서 죽어간 사람도 있었다. 이후에도 숙군은 이어져 1949년 7월까지 4,749명이 처벌받았다. 숙군 과정에서 짧은 시간 안에 뛰어난 실적을 올린 김창룡은 1949년 초 [[소령]]으로 승진하고, 6월 육군 방첩대([[CIC#s-1]]) 대장으로 임명되고, 7월 [[중령]]으로 승진했다. 불과 2년 3개월 만에 소위에서 중령까지 올라간 것이다. 김창룡은 애먼 사람만 빨갱이 딱지를 붙여 때려잡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 남용한 치졸하기 그지없는 자였다. 1946년 김창룡이 이리 소재 3연대에서 하사관으로 복무할 당시 소대장은 [[일본군]] 하사관 출신 '''김도영'''이었는데, 어느 날 김창룡에게 야간 순찰 후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김창룡이 이를 어기자 김도영 소대장은 김창룡을 꾸짖으며 지휘봉으로 몇 차례 때렸다. 이 일로 김도영에 대한 앙심을 품은 김창룡은 육사 3기로 임관한 후 특무대 소속 장교로 근무하던 중 1949년 [[제주 4.3 사건]] 토벌 시 6연대 1대대장으로 출전한 김도영이 제주도 내 좌익 세력과 내통하여 토벌을 소홀히 했다는 누명을 씌우고 특무대에 무려 6개월 간 구금시킨 채 혹독하게 취조했지만 혐의가 없다는 것이 밝혀지며 간신히 풀려났다. 이후 [[6.25 전쟁]] 도중에 부산지구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이던 김창룡이 부산 제2훈련소 부소장 김도영과 마주친 자리에서 '''"당신은 왜 이북으로 안가고 아직 여기 있느냐?"''' 라며 조롱하자 격분한 김도영은 권총을 뽑아들고 저 놈을 죽이겠다며 달려들어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면서 둘의 사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김창룡은 또다시 [[육군훈련소|논산훈련소]] 소장이던 김도영이 야당 인사인 [[신익희]]의 사주를 받아 훈련병들을 규합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고 모함하면서 그를 4개월 동안 구속수사 했고, 또 다시 무혐의로 석방되기는 했지만 이로 인해 장성 진급에서 미끄러진 김도영은 김창룡이 죽을 때까지 약 2년간 무보직으로 군생활을 하는 고역을 겪어야 했다. 또한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한 배후로 가장 유력한 인물이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277&aid=0003774552|#]] 안두희는 김구를 살해한 직후 경교장 주위에 있던 [[대한민국 육군]] 헌병들에게 체포됐다. 체포된 안두희가 끌려간 곳이 김창룡 앞이었다. 이때 김창룡은 안두희에게 '''"안 의사, 수고하셨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창룡은 이후 안두희를 끊임없이 챙겼다. 감옥에 있을 때 좋은 음식을 대접했고, 책 쓰는 것을 도와줬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김창룡은 안두희를 형무소에서 빼내 주었다. 안두희가 소위로 다시 임관할 때부터 대령으로 제대할 때까지 김창룡은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그래서 김구 암살의 배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