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창룡(군인) (문단 편집) ==== 권력투쟁 끝에 암살당하다 ==== || [[파일:김창룡 암살사건 범인 이유회와 허태영.jpg|width=100%]] || || 김창룡 암살사건의 범인 이유회와 허태영. || 결국 1956년 1월 30일 아침, 김창룡은 출근하던 도중 골목길에서 특무대 출신 4명(허태영 대령, 신초식, 송용고, 이유회)의 저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특히 이 가운데 주범인 허태영은 1950년 6.25 전쟁 때 김창룡이 방첩대([[CIC#s-1]]) 대장을 맡고 있는 동안 특무대 마산파견대를 이끌었다. 이후 특무대 대전파견대장을 지냈을 정도로 김창룡과는 잘 아는 사이였다. 허태영은 법정 진술에서 김창룡을 죽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김창룡은 평소 개인의 영달을 위해 무분별하게 사람들을 잡아들였으니 '''[[공산당]] 1명에 무고한 양민 10명의 비율로 무고한 사람들이 그의 손에 희생되었다.''' 김창룡이 취급한 사건들도 전부가 협박 공갈로 자백을 받은 것으로 '''대부분 허위 날조됐거나 침소봉대된 것들'''이었다. 한편 뒤켠에서는 살인, 약탈, 협박 등으로 군수품을 빼돌리고 밀수를 하는 식으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김창룡이 그간 모은 재산만 '''20억 원'''이다." || [[파일:김창룡 빈소 모습.jpg|width=100%]] || || 김창룡의 빈소 모습. || 허태영은 이유회와 함께 1957년 9월 24일 대구 육군정보학교 야외훈련장에서 총살됐고, 총을 맞고 쓰러질 때까지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송용고와 신초식 역시 1957년 12월 2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1958년 5월 21일 교수형당했으며 암살 사주자인 강문봉도 1957년 3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한달여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4.19 혁명 뒤인 1960년 10월 1일 석방, 1961년 3월 15일 복권되었다. 공모자인 공국진(1910~2014) 준장도 당초 7년이었다가 5년으로 감형되었으며 1960년 8월 31일 특별사면으로 가석방되었다. 이들 중 허태영, 송용고, 신초식은 사형당하기 전 김홍섭(1915~1965) 판사의 권유로 천주교에 귀의했다. 한편 [[이승만]]은 김창룡의 죽음을 보고 받은 그날로 [[중장]]으로 추서했다. 사건 발생 4일 후인 1956년 2월 3일, 국군 최초로 국군장이 열렸다. 그날 하루 육해공군 전 군부대는 조기를 게양했고 장병들의 음주와 가무도 금지됐다. 이승만은 김창룡 영전에 3번이나 조문하면서 진심으로 애통해했다. 이승만은 조사에서 "김 중장은 나라를 위해서 순국한 것이며 충령의 공을 세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5784|#]], 2016년 월간조선 <배진영의 기무사 비록>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1606100047|2회]]에도 나오며, 2007년 국가기록원 측은 특무대 측의 김창룡 저격사건 관련 수사기록, 검찰 측 판결문, 법무부의 사형집행종료보고, 미국 국무부 측 본 사건 보고서 등 총 3천여쪽 분량의 문건들을 공개했다.[[https://m.yna.co.kr/view/AKR20070703124500063|#]]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