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창룡(군인) (문단 편집) == 평가 == > 한 번은 김창룡이 잡아들인 수백 명의 영등포 특별부대 장병들이 재판에 회부됐다. 사건을 담당한 이운기 법무관은 이들의 진술서가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아 이상하다고 내게 문의해 왔다. 알아보니 김창룡이 부평을 순찰하는데 술집에서 [[조선인민군]] 노래가 울려 퍼져 즉각 술집을 포위해 잡아들이고 보니 특별부대 장병들이었다. [[중대장]]이 무조건 한 곡씩 노래를 하라고 시켰는데 한 병사가 노래를 못한다고 극구 사양하면서 "아는 노래는 월남하기 전 이북에서 배운 노래밖에 없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하라"고 해 생긴 소란이었다. 김창룡은 이들을 잡아들여 "친한 놈 이름을 대라"고 족쳤는데 그래서 수백 명이 검거됐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책임질 테니 무조건 무죄로 상신하라"고 했는데, 이 일로 이운기 법무관은 김창룡으로부터 '''"너도 빨갱이다. 꼭 잡아넣겠다"는 위협을 받았고''' 나([[백선엽]])와도 몇 달간 신경전을 폈다. >---- > - 『실록 지리산』 중에서. >"김창룡은 직속상관인 참모총장이나 국방부장관을 무시하고 '''직접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따위의 월권을 자행'''했다. 비위사실의 보고내용도 사적인 감정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김창룡은 정보를 군사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세력 확장에 이용'''했다. 그는 또 '''지휘관 사이를 이간시켜 장성들을 분열'''시켰다. 특무대는 본래의 사명을 망각하고 '''군 지휘관들을 감시하는 데 열중'''했다. 특무대는 군의 암적 존재다." >---- > - [[강문봉]] 당시 [[중장]]. 한국 현대사 인물 상당수가 그러하듯이, 김창룡 또한 극과 극의 평가가 오고가는 인물이다. 뼛속 깊은 반공주의자로 온갖 무리수를 두어가며 공산주의자들을 솎아내려 했기 때문에 김창룡의 측근이나 반공우파 입장에서는 찬양의 대상이다. 반면 그에 반감을 가진 군인이나 그 과정에서 가혹한 탄압을 당한 좌파 및 직간접 희생자 입장에서는 증오의 대상이다. 후술할 1974년 8월 21일자 동아일보 연재물 <비화 제1공화국> 344회차에 따르면 1974년 기준으로 김창룡 본인과 암살 당사자 4명이 다 사망한 상태임에도 암살 사건조차 의견이 엇갈렸으며, 당시 생존해 있던 대다수 관계자들도 "20여년이 지난 뒤에 와서 굳이 서로 원한을 품어서 무얼 하겠는가"라는 식으로 말을 아꼈다고 한다. 김창룡의 후임 특무부대장이던 정인택 준장 등 측근들은 한결같이 "어수선했던 시기에 공산당 타도에 앞장선 인물"이란 식으로 높이 평가했으며 제1연대 때부터 그를 보좌했던 최열 중위도 "부대장은 오로지 국가를 위해 일하다 암살당했다"고 했다. 반면 강문봉, 이진용 등은 김창룡이 군 내부의 기강을 문란시키고 사기를 저하시킨 터라 전 군이 공분을 느껴오던 터라 제거됐던 것이라고 보았다. 21세기가 지난 지금도 반공우파 성향 사람들은 김창룡을 찬양해마지 않는다. 그의 무덤에 매 해 꽃도 바치고, 김창룡을 욕하는 건 [[종북]] 행위라고 우기며, 2011년에는 이대인(당시 한국정보문화연구원 원장)이 쓴 전기 <대한민국 특무부대장 김창룡[[:파일:external/image.kyobobook.co.kr/l9788965239741.jpg|#]]>, 2022년에는 비망록 <[[https://nl.go.kr/NL/contents/search.do?srchTarget=total&pageNum=1&pageSize=10&insiteschStr=&schQuery=&mainSrchField=1&kwd=%EC%88%99%EB%AA%85%EC%9D%98+%ED%95%98%EC%9D%B4%EB%9D%BC%EB%A3%A8#viewKey=851330423&viewType=AH1&category=%EB%8F%84%EC%84%9C&pageIdx=1&jourId=|숙명의 하이라루]]>가 출간되었으며 군사학자 남정옥(현 국방부 국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이 엮었다. 당연히 내용 또한 서문에서부터 미화 일색이며, 독자들도 김창룡을 미화하는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2/04/26/2022042600208.html|후기(뉴데일리)]]를 남기고 있다. 반면 대다수 학계나 정치권에서의 평가는 당연히 부정적이다. 김창룡은 공산주의자 몰이만이 아니라, 군대 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수많은 촌극을 벌였다는 점, 그리고 그 촌극의 내용이 상당히 가관이라는 점에서 인간이 아닌 짐승 이하로 취급하는 시각이 만연해 있다. 군 출신 인사들 사이에서는 김창룡에 대한 시각이 엇갈리고는 한다. 일단 분단 후 [[여수·순천 10.19 사건]]과 같은 반란이 일어날 정도로 혼란한 상황에서 숙군 자체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어느 정도의 부작용을 감수하고 빨리 끝낼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선 김창룡이 필요악이라는 시선도 있다. 다만 이후 김창룡 개인의 권력욕이 개입해 '''억울한 피해자를 무수히 양산했다'''는 점은 빼도 박도 못하게 많은 이들의 지탄을 받는다. 권력을 남용하고 군의 지휘계통을 무시한데다, 숙군 과정에서는 지나친 무리수로 억울한 희생자를 많이 만들었다[* 다수의 억울한 희생자라는 도의적 문제 뿐 아니라, 그나마 얼마 안 되는 다수의 숙련병/전문 장교들이 숙군 과정에서 갈려 나가 군의 전력 측면에서도 해가 되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마디로 스탈린의 대숙청이 뻘짓인 것과 마찬가지.]는 이유로 한국군 원로들 상당수가 그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한다. 특히나 자유당 독재 시절에는 우익 성향이더라도 반 [[이승만]] 세력이라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공산주의자로 모함해대어 더더욱 원성을 샀다. 이로 인해 많은 보수/우익 인사들조차 김창룡을 자신들을 빨갱이를 모함한 미친놈이라고 평가한다. 대표적으로 박정희와 그 주변의 인사들도 김창룡이라면 이를 갈았다. 박정희가 5.16 정변을 일으켜 친 이승만계 인사들을 혁명 후에 조리돌림시키고 숙청한 것을 보았을 때, 김창룡이 암살당하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당하여 반병신이 되거나 끔살당했을 것이란 이야기도 있다. 같은 [[이승만]]의 오른팔이자 자신보다 더 한 술 떠뜬 살인귀였던 [[김종원]]의 비참한 운명이 그에게도 재현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김창룡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김창룡이 원한을 산 것은, 방첩활동 뿐 아니라 목적이 무엇이었든 간에 군 고위층의 비리를 캐낸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1950년대 당시 한국군은 전쟁 중 및 이후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서 파벌싸움과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었다. 군내에 평안도계, 함경도계, 구 일본군계 등이 고위직을 독식하고 많은 비리를 저지르고 있었다. 김창룡은 [[이승만]]에게 잘 보이고 싶은 권력욕은 있었을지언정, 의외로 금전비리에 대해서는 비교적 깨끗했다는 증언이 있다.[* 다만, 이런 증언의 신빙성에 대해선 각자가 알아서 판단하자. 당장 위의 본문에도 김창룡이 지금 돈으로도 적지 않은(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20억 원의 치부를 이뤘다는 증언이 나오는 판이다.] 이런 그가 군내 고위장성들의 비리를 파헤쳤기 때문에 큰 원한을 살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첩]]을 둬가며 호의호식하는 고관들은 감찰에 들어가 이삭 훑듯 여죄를 밝혀내가며 잡았다고 한다. [[4.19]] 이후 열린 재판에서 축첩, 재산 문제가 얽힌 고관 수가 당초 예상보다 적었던 건, 김창룡의 기여도가 적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옹호측의 주장이다.] 당장 [[강문봉]]이 김창룡 암살을 사주한 것도, 김창룡이 그와 관련된 각종 비리를 깊이 캐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강문봉은 은 육군 최대 파벌이던 함경도계의 핵심 인물이었기에, 자칫하다가는 [[정일권]]을 정점으로 하는 함경도계 군맥 전체가 위기에 빠질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김창룡 암살이 사실상 정일권의 지시였다는 주장까지 등장한다. 이처럼 김창룡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에는 부정부패를 저지르다 발각당한 인사들의 사적인 원한도 한몫을 했다는 것. 창군기 임관한 군 원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대부분 김창룡이 권력을 남용하는 경우가 많고, 거리를 두고 지냈다고 한다. 숙군 당시 처형을 당한 [[최남근]]조차 인간성, 지휘능력을 긍정적으로 평하는데 비해 평가가 안 좋은 편이다. 대체적인 김창룡의 평가는 권력욕을 위하여 죄없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모함한, 학살한 전적이 있으므로 죽어도 싸다는 평이다. 그랬기에 비교적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축구]]계 원로들 중에도 이 사람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들이 많다.[* 50년대 중순, 군인 축구 대회를 열면서 민간 축구 대회를 병행하라고 했다. 또 자신이 직접 보러 올 때까지 일절 경기를 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는데, 이걸 어기고 축구 경기를 하자 뒤늦게 오더니 축구협회 간부 따귀를 때린 적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네이트]] 김현회 칼럼에 축구대회에서 횡포를 부린 일화들이 소개된 바 있다.[[http://sports.news.nate.com/view/20130520n04757?mid=s1001&isq=5887|#]]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