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창희(야구)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 [[파일:기아 김창희.jpg]] || || [[KIA 타이거즈]] 시절. || || [[파일:두산 김창희.jpg]] || || [[두산 베어스]] 시절. || || [[파일:/image/003/2007/08/21/NISI20070821_0005015574_web.jpg]] || || [[삼성 라이온즈]] 시절. || || [[파일:ddfdfdfdfdfdf.jpg]] || || 해당 사진은 [[2007년]] [[4월 10일]] [[SK 와이번스|SK]]와의 경기 중 장면. [br] 여담으로 이 사진으로 인해 롤링창희, 퇴근창희(...) 라는 별명이 생겼다. || 프로 데뷔는 [[해태 타이거즈]]에서 했으며, [[2003년]] [[손혁]]과 함께 [[진필중]]을 상대로 현금 트레이드되어 [[두산 베어스]]로 가게 된다. 그 후 2006 시즌을 앞두고 [[강봉규]]와 함께 [[강동우]]와 맞트레이드로 삼성으로 이적했다. 경기 도중 [[이순철|거성]]으로부터 '저런 선수가 있어야 팀이 산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정작 거성은 그한테 밀려 해태의 외야 자리를 내주기도 했지만, 그만큼 자기 몫을 해낸다는 뜻. 계약금은 1억 6,500만원이었으며 이는 해태 역사상 [[한남자]]에 이은 2위 기록이다. 해태 시절 신인 때부터 .263의 타율과 9홈런을 기록하며 신인 치고는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그냥 저냥 평범한 수준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당시 [[이순철]]의 부진으로 인해 [[이호성|그 분]], [[최훈재]], [[이호준|로또]]와 더불어 90년대 후반 해태 외야의 한 축을 담당했다.[* 결국 1997 시즌이 끝난 후 김창희가 해태의 주전 외야수가 되었고, 이순철은 방출되어 삼성으로 이적한 뒤 거기서 은퇴했다.] 1998년에는 약간 성장하여 .267에 12홈런 64타점으로 팀내 홈런 4위, 타점 3위를 기록했으며, 대학 시절 보여준 모습도 있었기에 향후 타이거즈의 주전 외야수로 성장할 수 있을거라 믿었다. 하지만 1998년 시즌의 성적이 그의 커리어하이였으며, 타고투저가 극심한 1999년에도 비슷한 성적을 내는 등 기대 이하의 성적을 기록하다 2000년부터는 점점 성적이 떨어지더니 팀이 KIA로 간판을 바꿔단 뒤부터는 아예 벤치선수로 전락하였다. 급기야 2002 시즌 후 그는 [[진필중]]의 트레이드 맞상대가 되며 [[두산 베어스]]로 가게 된다. 두산에서는 [[정수근]], [[심재학]] 등의 이적으로 인해 외야에 공백이 발생해 기회를 꽤 얻었으나 준수했던 외야 수비에 비해 타격이 빈약해 여전히 주전 자리는 꿰차지 못했고, 준주전 혹은 백업 외야수에 그치며 명성을 떨쳤던 아마추어 시절에 비해 프로 시절에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2005 시즌 후 FA 자격을 얻었으나 당시 리빌딩에 한창이던 두산은 김창희와 계약을 거부했고, FA 미아가 될 위기에 처했다가 마감 직전에 가까스로 1년 1억에 싸인한 뒤 2006 시즌 시작 직전 팀 동료 [[강봉규]]와 함께 [[강동우]]를 상대로 [[삼성 라이온즈]]에 트레이드되었다. 삼성 시절에도 주로 백업 외야수로 쏠쏠히 활약했으며, 위의 사진처럼 2007년 4월 10일 SK전에서 홈 쇄도 중 SK 포수 박경완과 충돌 후 촬영된 사진 덕분에 다른 의미로(...) 유명해지며 초창기 [[야갤]]의 스타가 되었다. 여담으로 저 사진은 한동안 합성요소로 자주 사용되기도 했다. 또한 2007년 8월 10일 대구 현대전에서는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수훈선수에 뽑혀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 도중 감격의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여러 코치들의 평에 의하면 발은 빠르지 않지만 낙구지점 판단력이나 송구과정 등의 [[외야수]] 수비 플레이에 있어선 국내 최고라고 한다.[* 그 때문에 발이 빠르지 않음에도 [[중견수]]도 볼 수 있었다.] 팀 내에서는 두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강봉규]] 선수와 친한 선후배 사이인 듯. 2009년 시즌 종료 뒤로는 김창희가 전력분석원으로 활동하게 됨에 따라 [[강봉규]]가 홀로서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일각에서는 김창희도 [[김종국(야구선수)|김종국]], [[김재걸]], [[백재호]], [[강혁(야구)|강혁]], [[최만호]]와 마찬가지로 아마추어 시절 길들여져 있던 알루미늄 배트에 비해 프로에서는 나무배트에 적용하지 못하고[* 참고로 대학야구는 2000년까지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했으며, 고교야구의 경우 2004년까지 사용했다.] 아마추어 시절의 명성에 비해 프로에서 실패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래도 1998 성적을 보면 저 다섯의 커리어하이보다 비슷하거나 잘했다.] 그래도 한국시리즈 우승 복은 나름 있었는데, 1997년 해태, 2006년 삼성에서 각각 우승반지를 껴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