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철(1898) (문단 편집) == 생애 == 1898년 9월 6일 [[경상북도]] [[경주군]] 남도면 수영포(현 [[경주시]] [[양남면]] 수렴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주군 경주면 성건리(현 경주시 [[성건동]])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일찍이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이후 경주 계남학교[* 1939년 경영난으로 폐교되었다.]와 [[계성고등학교(대구)|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슈케에(主計)학교를 졸업하고 [[주오대학]] 전문부 법과를 다니다가 3학년 때 중퇴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11일부터 12일 이틀에 걸쳐 경주군 경주면 노동리(현 경주시 [[노동동]]) 교회당에서 목사 [[박내영]]과 장로 윤기효(尹琪涍) 등의 주도로 이튿날인 13일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고 [[박문홍]]의 집에서 태극기 300여 개를 만드는 등 준비를 하다가 일본 경찰에 사전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며칠 후 15일 그는 박봉록(朴鳳祿)·서봉룡(徐鳳龍) 등과 함께 경주면 장날에 장터에 모인 다수의 군중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가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4월 15일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 또는 경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4개월형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508&evntId=0034993531&evntdowngbn=Y&indpnId=0000024466&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경주 계남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신간회]] 경주지부장으로 활동하였다. [[8.15 광복]] 이후 [[미군정]]청 경주군 [[고문(직위)|고문]]을 역임하면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서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경상북도 경주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일민구락부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안용대]]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인 [[자유당]] 안용대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의당(1963년)|국민의당]] 후보로 경상북도 경주시-월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이상무(정치인)|이상무]]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8년 3월 21일 경상북도 경주시 황오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803210020920701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8-03-21&officeId=00020&pageNo=7&printNo=17372&publishType=00020|별세하였으며]], 199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