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춘수 (문단 편집) == 생애 == [Youtube(eR_LqjKtzFw)] 1986년 4월 30일 KBS2 <11시에 만납시다> 인터뷰 영상. [[1922년]] [[11월 25일]] [[경상남도]] [[통영시|통영군]] 통영면 서정(현 [[통영시]] 동호동)에서 아버지 김영팔(金永八)과 어머니 허명하(許命夏)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http://commbooks.com/%EB%8F%84%EC%84%9C/%EA%B9%80%EC%B6%98%EC%88%98-%EC%8B%9C%EC%84%A0-%EC%B4%88%ED%8C%90%EB%B3%B8/|#]]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 예술학부에서 공부했으나, 1942년에 [[천황]]과 [[조선총독부]]를 비판하여 1943년에 퇴학당했다. 1946년에 귀국하여 1951년까지 통영중학교, 마산고등학교에서 교사를 역임했다. 1946년에 시 <애가>를 발표하면서 등단, 이 때부터 시를 본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1961년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전임강사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교단에 들어선 그는 1964년부터 1978년까지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영남대학교]]의 문리대 학장을 지내다가 1981년에 정계로 들어오며 교수직을 내려놓았다. 이후 시인과 평론가로서 활동한다. 1948년 첫 시집인 〈구름과 장미〉 출간을 시작으로 시 〈산악(山嶽)〉, 〈사(蛇)〉, 〈기(旗)〉, 〈모나리자에게〉, '''〈[[꽃(김춘수)|꽃]]〉''', 〈[[꽃을 위한 서시]]〉 등을 발표하였다. 다른 시집으로는 〈늪〉,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타령조 기타〉, 〈처용(處容)〉, 〈남천〉, 〈비에 젖은 달〉 등이 있다. 1958년에 한국시인협회상, 1959년에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한편 [[흑역사]]도 있는데, 1981년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11대 전국구(현 [[비례대표]]) 국회의원, 방송심의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대한민국 제5공화국]]에 대한 '''친군부''' 행위다. 등단 이후 시에 정치적 견해나 현실을 잘 드러내지 않고, 허무주의에 기반을 둔 인간의 실존과 존재를 노래했던 시인으로서는 실망스러운 행보였다. [[전두환]] 대통령을 찬양하는 ~~[[용비어천가]]~~시를 지었다가 지금도 까이고 있는 [[서정주]]처럼[* 물론 [[서정주]]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전적이 참으로 화려했던지라]] 이 방면에서도 독보적으로 까이고 있지만 김춘수는 적어도 그 짓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제를 비판하다가 [[퇴학]]당하기까지 했다.] 김춘수도 [[전두환]]을 찬양하는 헌정시를 지었다. [[https://youtu.be/FCiy1Da_S8s|# KBS 영상]][* 1988년 2월에 있었던 퇴임 만찬 때 낭독되었던 시다. 흡연에 매우 관대하던 1980년대답게, 공식 석상임에도 너무나 태연자약하게 담배를 꼬나무는 [[전두환]]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영상을 잘 보면 객석에서도 연기가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참고로 낭독하는 사람은 성우 [[고은정]]이다.] ||님이시여 겨레의 빛이 되고 역사의 소금이 되소서 님이 태어나신 곳은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내동 마을 한반도의 등줄기 소백의 긴 매 뿌리 뻗어내려 후미지고 아늑한 분지를 이룬 곳 천구백삼십년대의 어느 날 님의 일가는 일본 제국주의의 그 악마의 등쌀을 견디다 못해 정든 땅 이웃을 버리고 머나먼 남의 땅 만주벌판으로 내쫓기는 사람들처럼 억울하게 억울하게 떠나가야만 했으니 그 때 가족들의 간장에 맺힌 한과 분은 아직도 여리고 어린 님의 두 눈과 폐부에 너무도 생생하게 너무도 깊이깊이 박히었을 것입니다 님이 헌헌장부로 자라 마침내 군인이 된 것은 그것은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천구백칠십구년 가을에서 팔십년 사이 이 땅 이 겨레는 더할 나위 없는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은 우선 그것부터 끄고 봐야하듯이 우선 치안을 바로잡고 우선 인심을 안정시키고 우선 경제의 헝클어진 운행을 궤도위에 올려놓아야만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해내기 위하여 천구백팔십일년 새 봄을 맞아 마침내 제 5공화국이 탄생하고 님은 그 방향을 트는 가장 핵심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보십시오 님께서 단임으로 평화적 정부이양을 실천한 일 그것입니다 건국 이래 가장 빛나는 기념비적 쾌거라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님은 선구자요 개척자가 되었습니다 그 자리 물러남으로 이제 님은 겨레의 빛이 되고 역사의 소금이 되소서 님이시여 하늘을 우러러 만수무강 하소서|| 이러한 친군부 행위는 〈꽃〉 등으로 단순히 김춘수를 서정시인 및 순수시인으로만 알고 있는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다(고교 문학 시간에도 이 행적을 언급하는 교사들도 있긴 하다). 다만 김춘수 본인은 이 시기를 두고, “한 마디로 100%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처량한 몰골로 외톨이가 되어, 앉은 것도 선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어쩔 줄 모르고 보낸 세월”이라 회고하면서 사과했다고 전해진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0411300028636797|출처]]. [[2004년]] 8월, 기도폐색으로 쓰러져 호흡곤란으로 인한 뇌 손상을 입어 [[분당구|분당]][[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했지만, [[2004년]] [[11월 29일]] 아침 9시에 82세로 별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