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태술 (문단 편집) === 아마추어 시절 === 동아고 시절부터 천재 [[포인트 가드]]란 말을 들었으며 '''[[강동희]] - [[이상민(농구)|이상민]] - [[김승현(농구)|김승현]] 으로 이어지는 '6년 가드설'을 잇는 천재 가드'''의 출현이 아니냐는 기대까지 받았다. 청소년 대표팀에도 뽑혔다. 그리고 입학 예정자 신분으로 처음 출전한 [[2002-03 농구대잔치|농구대잔치]]에서 그런 기대가 괜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입학 예정자라는 대학생도 아닌 병아리 신분으로 출전한 주제에 고려대 격파의 주역이 되고 당시 [[정재호(농구)|정재호]]가 있던 경희대 격파의 선봉장이 되었으며 결승에서 만난 상무 상대로도 좋은 활약을 보이며 연세대의 농구대잔치 우승을 이끌었다. [[파일:external/blog.joinsmsn.com/kts.jpg]] ~~[[스렉코비치]]?~~ [[연세대학교]] 시절. 그 후 선배인 [[이정석]]과 [[포인트 가드]]를 번갈아 맡으며 선배인 [[방성윤]]과 [[전정규]], 동기인 [[양희종]], [[이광재(농구)|이광재]] 등과 함께 연세대가 대학 최강자로 자리 잡는데 일조했다.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도 대학생 신분으로 합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학 생활 후반기에는 선배들의 졸업과 함께 힘을 키운 중앙대와 경희대의 대두로 인해 연세대 농구부가 차츰 패권을 잃어 가는 모습을 보고 만다.[* 선배들의 졸업도 있지만 2004년 하승진의 입학으로 인해 그 해 연세대가 빅맨을 뽑지 않았다가 하승진이 NBA에 진출했고, 2005년에 입학한 빅맨 자원인 김동현, 손진우가 이탈해 버리면서 빅맨이 없어진 탓도 크다. 김재환이 5번을 보았지만 그나마 반칙이 많아 양희종이 '[[센터(농구)|센터]]킬러' 소리까지 들어가며 4~5번을 봤던 상황. 거기다 명장 소리 들으며 팀을 이끌던 김남기 감독도 나가리되어 버렸으니. 그럼에도 양희종이 인사이드에서 경이적인 활약을 보인 덕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는데, 대학 후반기에는 결국 한계가 오고 말았다.] 고려대와의 정기전 성적 역시 좋지 않다. 시작은 2004년(2학년) 정기전에서 내내 앞서고 있다가 양희종의 파울아웃 후 귀신같은 역전패를 당한 것. 신제록과의 매치업에서도 줄곧 우위를 점했지만 신제록이 역전 클러치 3점을 때리는 바람에 다 망치고 말았다(…). 2005년(3학년) 정기전은 이동준(다니엘 산드린) 출장 문제로 경기 전부터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나는 등 2시간여 가까운 파행을 겪다가 가까스로 진행됐는데, 연대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처참한 패배를 당한다. 부상과 파울이 겹친 양희종이 빠지자 전반전에 이미 20점 차 가까운 점수차가 나버린 것. 김태술, [[이광재(농구)|이광재]], [[이정현(1987)|이정현]]의 연세대 가드진이 [[정의한(농구)|정의한]]-신제록 콤비에게 순삭당한 탓도 컸다. 4년의 정기전 중 김태술이 가장 부진했던 해. 덕분에 박건연 감독은 바로 잘렸다(…). 이듬해(4학년) 정기전 역시 15점 차로 대패하며 영 좋지 않은 성적을 남기고 졸업하였다. 그럼에도 대학 최고의 [[포인트 가드]]는 분명 김태술이었고, 프로농구 2007년 드래프트 1순위로 [[서울 SK 나이츠]]에 입단, [[전주 KCC 이지스]]로 이적한 [[임재현(농구)|임재현]]을 대신해 주전 포인트 가드 자리에 무혈입성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