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현구 (문단 편집) ==== 책에서 김현구 교수가 보인 [[일본서기]]에 대한 태도 ==== >나는 우선 <일본서기>를 근거로 일본과 한반도 각국의 교류에 대해 조사했다. <일본서기>에서 임나 문제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기를 조사해보니 백제에서는 동성왕(東城王, 재위 479~501)과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23) 시기이고, 일본에서는 케이따이천황(經體天皇, 재위 507~31)이 즉위한 때부터 시작해서 킴메이천황(欽明天皇, 재위 540~71) 20년(559)까지의 50여 년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이 기간 동안 일본은 중국과 사신을 교한한 흔적이 전혀 없다. 고구려, 백제, 신라와는 양국이 각각 한 번씩 사신을 보내지만 일본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임나와 교류한 것에 관해서는 임나가 다섯 번 사신을 보냈지만 두 번은 백제의 사신에 딸려서 보낸 것이고, 한 번은 신뢰하기 어려운 것으로 결국 확실한 것은 두 번뿐이었다. '''일본에서는 임나에 두 번 사신이 온 것으로 되어 있으나 다 인정하기 어려운 것들 뿐이다. 52년 동안 일본은 중국이나 고구려, 신라, 임나와는 거의 공식적인 교류를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 >그런데 같은 기간에 백제와 일본 사이에는 백제가 스물세 번이나 사신을 파견했고, 일본도 열네 번이나 사신을 보내왔다. 백제가 파견한 스물세 번의 사신 중에서 그 목적이 분명했던 것은 여덟 번인데 전부 군원(軍援)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백제가 군원을 요청한 것에 대해서 일본은 아홉 번 군원을 제공한다. 일본의 군원에 대해서 백제는 전후 아홉 번에 걸쳐서 오경박사(五經博士) 등의 전문가와 유교나 불교 관계 등의 선진문물을 보냈다. > > <일본서기>를 조사해보면 일본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기간에 일본은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임나와는 거의 공식적인 관계가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일본서기>를 근거로 일본이 임나를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일본 학자들은 <일본서기>를 근거로 일본이 임나를 지배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일본서기>의 내용 중에 외국과 교류한 것을 근거로 하면 임나일본부설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콜롬버스가 달걀을 세운 것보다도 쉬운 일이었던 것이다.''' 일본이 임나와 공식적인 관계가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상 '''일본이 임나를 지배했다는 증거로 제시되었던 내용들은 전면적으로 재검토되지 않으면 안된다.''' 김현구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1) 근거 없는 '가야 사신 파견설'은 완전 부정하고 있다. 2) 오히려 일본서기만 검토해도 [[임나일본부설]]은 있을 수가 없다는 걸 입증할 수 있다. 3) [[일본서기]]에서 왜곡된 [[임나일본부설]]을 버리고 재검토하자 >일본이 임나에 직할령을 두고 임나를 지배했다는 확실한 증거로 제시하는것이 [[일본서기]] 509년 기록이다. 509년 기록의 "사자를 백제에 보냈다. 임나의 일본(日本)현읍에 있는 백제의 백성 중 도망해온 자와 호적이 끊어진 지 3~4대 되는 자들을 찾아내 백제로 옮겨 호적에 올리게 하였다"라는 내용을 근거로 임나에 있는 '일본현읍'이라는 곳은 '일본'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일본의 직할령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일본현읍'은 일본이 임나 내지는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좋은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日本)이라는 명칭은 7세기에 생겨난 말로 '일본현읍'이라는 표현이 보이는 509년에는 '일본현읍' 중의 '일본'이라는 표현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일본서기]]에 보이는 '일본현읍'의 정확한 표현은 '○○현읍'으로 그 주으이 '일본'이라는 단어는 720년에 [[일본서기]]를 편찬하면서 집어넣은 셈이 된다. 따라서 509년 기록의 '일본현읍'이라는 표현을 근거로 해서 509년에 일본이 임나에 직할령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002, 창비, 70~71쪽 여기서 김현구는 분명하게 509년의 기록에 "사자(使者)를 백제에 보냈다. 임나의 일본현읍(日本縣邑)에 있는 백제의 백성 중 도망해온 자와 호적이 끊어진 지 3~4대 되는 자들을 찾아내 백제로 옮겨 호적에 올리게 하였다"는 '''기록은 후대에 일본이 지어낸 [[주작]]이라고말했다.''' >543년 기록에 일본 천황이 "쯔모리노무라지를 보내어 백제에 이르기를 '임나의 하한에 있는, 백제의 군령, 성주를 일본부에 귀속하라'라고 하였다"는 내용을 근거로 '일본부'는 '일본'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일본의 기구가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일본부'가 일본의 기구가 분명하다면 그것은 일본이 임나를 지배하기 위해서 설치한 기구가 분명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일보눕'라는 기록이야말로 일본이 임나를 지배한 확실한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읍'과 같은 이유로 당시 '일본부'의 정확한 표현은 '○○부'로 '일본부' 중의 '일본'이라는 표현은 720년 [[일본서기]]를 편찬할 때에 집어넣은 셈이 된다. 그러므로 543년 기사에 나오는 '일본부'의 '일본'이라는 표현을 근거로 해서 543년에 일본이 임나를 지배하기 위한 기구를 설치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002, 창비, 71~72쪽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543년 기록에 일본 덴노가 "쯔모리노무라지(津守連)를 보내어 백제에 이르기를 '임나의 하한(下韓)에 있는, 백제의 군령, 성주를 일본부(日本府)에 귀속하라'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있는데 '''720년에 벌인 [[주작]]이라고 말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