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홍도 (문단 편집) == 생애 == 1745년 아버지 김석무(金錫武)와 어머니 문필주(文弼周)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하급 무관에 대대로 출사하던 무반 가문으로, 5대조 김득남(金得男)은 수문장(守門將)을, 고조부 김중현(金重鉉)은 별제(別提), 증조부 김진창(金震昌)은 만호(萬戶)를 역임했다. 그러나 조부 김수성(金壽星) 대부터는 관직에 진출하지 못했으며, 김홍도가 태어나던 시기에는 신분이 중인으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이후 [[강세황]]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1771년 [[정조(조선)|왕세손]]의 [[초상화]]를 그리면서부터 경력을 쌓아나갔다. 이후 1781년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인 어진화사로 임명되어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다. 1789년에는 [[스승]]인 [[김응환]]과 함께 [[일본]]의 [[지도]]를 그려오라는 밀명을 받고 떠났는데 김응환이 병으로 죽자 혼자 [[쓰시마 섬]]으로 건너가 일본 지도를 그려 가지고 돌아왔다. 당시 지도는 국가기밀이었기에 그 정도 임무를 맡을 정도로 정조가 믿고 아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90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사[* [[왕릉]] 근처에 세운 절.]로 지정한 [[수원시/역사|수원]] [[화성시/역사|화산]][* 현 [[경기도]] [[화성시]] [[화산동(화성)|화산동]].] [[용주사]]의 [[대웅전]]에 화승들의 [[불화]] 작업을 감독했다. <삼세여래후불탱화>라는 이름의 이 그림은 걸작으로 손꼽히는데 과감하게 서양 화법을 도입한 작품이기도 했다. 이러한 공들로 1795년 연풍 [[현감]]으로 임명되었지만 곧 사임했다. 1796년 다시 왕명으로 용주사의 <부모은중경>의 삽화를 그렸고 1797년 국가에서 발간한 <오륜행실도>의 삽화를 그렸다. 언제 죽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1980년대만 해도 상당수 학습 관련 책이나 [[위인전]]에서는 김홍도가 1760년생이라고 표기할 정도로 생몰연도에 대하여 주장이 서로 다르다. 그나마 요즘은 1745년생으로 거의 일치화되고 있다. 또한 1990년대 [[삼성전자]]에서 나눠주던 한국화 관련 [[달력]]에 나온 김홍도의 그림 설명에서는 1745년에 태어나 1818년에 사망했다는 표기를 한 바 있다. 기록으로는 1805년에 병이 위중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만 이때 죽었는지 어땠는지는 알 길이 없다. 대체적으로 1810년 전후로 사망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4학년 미술책에는 1745~1801이라고 나타내기도 한다. 김홍도는 [[영조]], [[정조(조선)|정조]] 시대에 활동하며 조선의 화풍에 지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청나라]]를 통해 익힌 것으로 보이는 서양 화법을 과감하게 도입해서 색채의 농담과 명암으로 원근감을 드러낸 훈염기법을 도입했다. 또한 이전 화가들이 그리지 않았던 민중들의 삶을 그려낸 풍속화들을 많이 남겼는데 김홍도의 풍속화는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대표적으로 <서당>, <씨름> 등이 있는데 농사짓는 사람, 빨래하는 아낙 등을 그렸다. 이는 당대로서는 상당히 놀라운 전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학자]]들은 김홍도의 풍속화가 정조의 [[개혁]] 정치와 관련이 깊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2013년 김홍도의 작품집으로 알려진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은 사실 '김홍도의 작품이 아니라'는 주장이 학계에 나와서 논란이 깊어지고 있다. 만약 주장이 사실이라면 [[교과서]]부터 해서 모든 것을 갈아엎을만한 폭탄이 떨어진 셈이다.[* 단원 풍속도의 대중적 지명도 때문에 이런 표현을 하기는 하지만 김홍도는 다양한 [[장르]]에서 대단히 많은 작품을 남겼고 풍속도첩에 수록된 25점의 풍속도는 김홍도 전체 작품 세계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에 [[논란]]의 결과가 어떻든 화가로서 김홍도의 위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는 하다.] [[신윤복]]과 마찬가지로 [[춘화]]도 꽤 많이 그린 편인데 운우도첩의 경우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춘화도첩으로 꼽힌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후대의 작품이라고 하는 설이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는 등 춘화를 그리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신윤복과 함께 풍속화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수박 겉 핥기]] 식인 평가이다. 이것은 중고등학교 [[미술]], [[국사]] 시간에 스쳐지나가듯 배우기 때문이다. 신윤복은 정말로 풍속화만 남겼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기타 작품은 전무한 반면에 김홍도가 그렸다고 알려진 작품은 엄청나게 많다. 작품이 현재까지 전해져 온다는 것은 당대부터 엄청난 [[네임밸류]]를 쌓아왔다는 증거다.[* 현대에 재평가된 작가가 아닌 이상 수많은 작품들이 소장되어 전해져 온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김홍도는 [[한반도]] 전통 화단의 정수라고 평가받는데 국가적인 [[프로젝트]]를 비롯하여 [[탱화]][* 삼세여래체탱 (三世如來體幀), 용주사], 산수화[* 금강사군첩 (金剛四郡帖) 一], 인물화[* 강세황 초상], 영모화[* 송하맹호도 (松下猛虎圖)] 할 것 없이 모든 장르에서 완벽한 화풍을 보여준다. 조선 시대에는 시서화라 하여 시, 서예, 그림 3가지를 모두 [[취미]]로 삼거나 단련하는 문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한 장르에 통달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또한 장르 하나에 국한된 '문인 화가'들이 많았던 반면 김홍도는 '직업 화가'로서 그림에만 충실했으며 재능이 더해져 장르에 국한받지 않고 다재다능하게 소화한 조선 시대 통틀어서 유일무이한 화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