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홍일(군인) (문단 편집) == 기타 == * [[중국]] 국민혁명군 및 광복군 출신인 김홍일과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이응준]][* 이응준 장군은 독립운동가이자 안중근 의거를 후원한 이갑의 사위이기도 하다.]의 관계는 그들의 출신과는 무관하게 상대적으로 상당히 가까웠던 것으로 나타난다. 김홍일과 이응준은 1976년 『세대』의 지면을 통해 광복군과 창군 시절을 회고하는 대담을 나누기도 했다. >“李 = 만주와 중국 출신 그리고 일본 출신 더러는 유해준, [[이성가]] 씨와 같은 광복군도 대거 새로운 조국의 깃발 아래 모여 들었다” >“金 = 그때의 보기 좋았던 광경은 출신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지만 서로 추천하고 천거하는 모습” >---- >이응준, 김홍일 「光復軍․創軍時節」(1970). 『세대』 제14권(통권 157호) 71쪽 * 중국 [[망명]] 당시 김홍일 장군의 편지를 망명 3개월 만에 국내의 [[가족]]들에게 처음으로 전달한 사람도 [[이응준]] 장군이었다고 한다.[* 김홍일의 오산학교 후배이자 이세호 주월한국군 사령관의 작전참모를 맡았던 전제현 예비역 소장 증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현대한국구술사연구사 업단,「전제현 장군 3차 구술면담」2014.6.9.] [[6.25 전쟁]] 당시 미아리지구전투사령관이던 이응준 장군이 [[한강]]을 도강하자 노량진에서 혈혈단신 병력을 수습하고 있던 김홍일 장군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에 두 사람은 수원의 육군본부로 가서 각각 시흥지구전투사령관, 수원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되는데 이 과정에서 이응준 장군이 김홍일 장군을 도와 [[채병덕]] 총참모장을 적극 설득하여 김홍일 장군이 시흥사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 * [[육군사관학교]] 교장 시절 훈련이 없는 토요일에는 생도들에게 미국 [[서부영화]]를 보여주고는 했는데 "남자답게, 뒤에 서지 말고 항상 정정당당하며 정의롭고 용감해라"라고 훈화했다 한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fromage&logNo=220349066292&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kr%2F|#]][* 블로그 글에 따르면 2015년 한 군사학술단체 춘계 세미나에 참석한 육사 생도들의 상당수가 김홍일 장군을 모른다는 설문 답변이 나왔다. 6.25 전쟁사 관련 과목이 4학년에 나와서라는 이유. 김홍일이 독립운동가이자 전쟁 영웅인 점은 둘째치고 육사 교장을 역임했는데도 육사 생도들조차 잘 모른다는 것은 아쉬움이 큰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6.25 전쟁에서의 뛰어난 활약으로 1983년(휴전 30주년) 국방부 선정 4대 영웅에 포함되었다. 나머지 3인은 국군 대장 [[김종오]], 미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미군 대장 [[월튼 워커]]. [[http://www.ppomppu.co.kr/zboard/view.php?id=freeboard&no=7076862#new_comment_area|#]] * [[국가보훈처]]는 [[http://edu.mpva.go.kr/learn/card/detail.do?bsrlNo=1377|'캡틴 코리아'라는 별칭으로 김홍일 장군의 업적을 소개했다.]] * 타계 40주기를 맞은 2020년 8월 [[전쟁기념관]]의 '이 달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었다. * 육군 수도방위사령부도 부대 건물 중 하나에 김홍일 장군의 이름을 붙였다. * 조카인 [[김영재(1911)|김영재]]도 독립운동가이며 국민혁명군, 대한민국 공군에 복무했다. 홍커우 공원 의거 당시 윤봉길이 사용할 폭탄을 제조하는데 참여했으며, 국민혁명군 공군에서 기계사를 맡았고 장개석 총통의 전용기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광복 후 6.25 전쟁 발발 당시 여의도 비행장에서 후방요원들을 수원기지로 후송하는 역할을 하였고, 공군 정비창장을 역임했으며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 [[김석원]]에 대해서는 그다지 좋게 보지는 않았다. 6.25 전쟁 초기 시흥사를 창설할 때만 하더라도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지만 포항 전투 중 김홍일이 수도사단 사령부 막사를 지나다가 김석원과 국방부 장관 [[신성모]]의 대화를 들었는데 일본군을 참전시켜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그 자리에서 바로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로 인해 1군 사령관에서 물러나고 육군종합학교장으로 옮겼다가 대만대사로 가면서 예편을 하게 되었다. 예비역 소장 전제현이 월남전 당시 국회의원 시찰단으로 나온 김홍일을 영접하면서 저번 달에 김석원이 다녀갔다고 하니 김홍일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김석원이.."라고 하며 해당 일화를 이야기하였다. 실제로 일본군 참전이 진지하게 논의되었는지 김홍일의 말에 따르면 "그 정신나간 사람(김석원, 신성모 중에 누구를 지칭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실제로 이렇게 지칭하였다.)이 이승만 박사께 건의하자 이 박사께서 일본군을 참전시켜도 좋으나 북한군과 전투 시 일본군부터 몰아내고 전투하시오.라고 하여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고 했다고 한다. * 그를 직접 만나 본 사람들의 회고와 그의 어록 등을 정리한 블로그가 있다.[[https://m.blog.naver.com/fromage/22034906629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