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효범 (문단 편집) === KBL 데뷔 이전 === 잠원초등학교 5학년 시절에 가족 전체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성장, 캐나다 [[밴쿠버]] 옆에 있는 랭리라는 도시에서 살았다.[* 밴쿠버에서 자동차로 약 40분정도 떨어져 있는 도시이다.] 월넛 그로브 세컨더리 스쿨 출신으로 쥬니어 스쿨 시절부터 학교 농구팀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주전 상당수가 170-180대 한국인인 팀을 이끌고 여기서 30점에 평균 득점과 더불어 블락을 제외한 스탯을 독식하며 팀을 주 4강으로 이끌면서 랭리시 MVP, BC주 올스타로 뽑혔으며 주 6위의 유망주에 랭크되는 등 유명세를 탄다. 특히 [[빈스 카터]]의 360윈드밀이나 [[마이클 조던]]의 크레이들 덩크, [[코비 브라이언트|코비]]의 비트윈더렉 덩크 등을 구사하면서 동양인 최초로 BC주 덩크왕에 오른 고2 시절은 당시 지역 일간지, 교포 신문에도 크게 나온 바가 있다.[* 한국에 와서는 허리수술을 해서 점프력이 많이 낮아졌지만 리즈 시절에는 105cm에 이르는 가공할만한 점프력을 자랑하여 시합 중에도 윈드밀이나 더블클러치 덩크 등을 종종 구사했다. 드래프트 직후 워크아웃 때는 림 위에 작은 네모를 손목으로 치는 것을 시연하여 관중을 놀래켰을 정도로 이게 이게 어느정도냐면 현재 한국 배구 최고의 탄력을 자랑하는 전광인의 타점보다도 10cm 정도 더 높다.] 12학년 시절 24득점 8리바운드를 평균으로 하는 성적을 거두면서 캐나다 스포츠 다이제스트가 선정하는 고교선수 12위에 꼽히고 올 캐네디언 나이키 캠프에 초청받는 등 캐나다 고교농구의 실력자로 인정받는다. 그의 경기를 지켜본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 관계자가 붙여준 별명은 코리안 조던, 그리고 NCAA 1부리그 WCC 컨퍼런스의 포틀랜드 대학으로 진학하여 당시 NCAA 1부에 진출한 단 3명의 아시아인 중 하나로서 교포 잡지 KORAM에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포틀랜드 파일럿츠, 김효범이 입학하기 직전에 190위 정도 하는 NCAA 1부 리그 중하위권 팀이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외국파 선수 출신인 이승준, 이동준, 김효범 셋이 차례로 포틀랜드 대학을 거쳐갔다는 것이었다. 이승준이 전학 가니 이동준이 들어오고, 이동준이 가는 해에 김효범이 들어온다. 원래 서로 아는 사이라서 이승준이 김효범에게 진로를 선택하는데도 영향을 줬다고 한다.] 하지만 NCAA 리그 적응에 다소 힘들어하면서 결과는 좋지 않았다. 2002년 9월 14일에는 UCLA와의 경기에 출전한 모습이 전파를 타서 한국에 방영되기도 했는데, 이를 본 해설위원의 평가는 공격력이나 하드웨어는 좋지만 팀수비를 비롯한 유기적인 움직임에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고교시절 혼자서 해결하는 공격농구에 익숙해진 탓에 리그의 수준차 때문인지 하여튼 적응에는 실패했다. 이에 대해 본인은 자신을 스카웃했던 코치가 사임, 새로 들어온 코치진의 인종차별 문제까지 겪으면서 팀 리빌딩 계획에서 배제당하고 레드셔츠 신분으로 1년을 허비했다고 회고한다. 결국 그렇게 그는 평균 2.4득점의 초라한 기록을 남기고 전학을 가게 된다.[* 원래 대학 진학 때 이야기가 있었던 big west 컨퍼런스의 롱비치 스테이트로 전학을 간다는 계획이었으나 훗날 그의 에이전트가 되는 존 김이 '네가 어디서 뛰든 NBA 스카우터를 꼭 보내주겠다'라고 설득하여 NAIA 리그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NCAA 규정상 리그 내의 전학생은 1년간 출전이 제한되기 때문에 이미 2001년부터 포틀랜드에서 공백이 길었던 김효범으로서는 더이상의 공백이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로 국내 팬들에게 NCAA 1부 경험자라는 사실은 잘 기억되지 않고 마치 길거리 동아리 출신인양 폄하를 당하기도 했다.][* 재미있게도 당시 wcc 컨퍼런스 신인왕이자 올 컨퍼런스 팀에 들었던 테런스 존슨 역시 같은 리그, 같은 컨퍼런스로 전학을 가면서 다시 매치업을 하게 되는 기묘한 인연을 연출하기도 한다.] 2003년에는 [[스티브 내시]] 등과 함께 캐나다 국가대표 15인 예비멤버로 연습경기까지 뛰었으나 결국 탈락한다. 그리고 2004년 유니버시아드 대표 때도 소집되었으나 한국 국가대표를 염두에 두고 고사한다. 전학 가서는 NAIA 리그 gsac 컨퍼런스 소속의 뱅가드 대학교의 에이스로 활약하여 평균득점 18점으로 컨퍼런스 득점왕, 6승 18패의 하위권 팀을 17승 7패의 중상위권 팀으로 올려 컨퍼런스 토너먼트에 올리기도 한다. 이후 2003년 말부터 경희대에서 한두번 연습경기를 가지고 미디어 워크아웃을 보여주는 등 KBL 진출을 염두에 두는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전에도 덩크대회 우승, NCAA 진출, UCLA와의 경기, 캐나다 국가대표 엔트리 포함 등으로 교포 사회에서 유명하고 국내에서도 간간히 화제가 되곤 했으나 단발성이었다.[* 당시는 단순한 원핸드, 투핸드, 백덩크 정도만 깔끔하게 성공시켜도 덩크왕을 노려볼 정도의 수준이었고 기껏해야 연습 때 360도, 앨리웁 정도를 할 수 있을까 없을까 하는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허니딥, 비트윈더렉, 윈드밀, 크레이들, 더블클러치 덩크, 211cm 수비 위로 덩크 등 운동능력이 현저히 좋아진 지금 선수들조차도 엄두를 못 내는 덩크를 구사하는 한국인의 존재에 대해 쉽사리 믿기 힘들다는 반응이 많았고 이후에도 관련 주제에 언급되면 종종 미국 시절은 약을 한게 아니냐는 드립이 종종 나온다.]미디어 워크아웃으로 화젯거리가 되던 중 말에 이런 소문에 대한 증인들과 일부 영상이 증거로 나오고[* 미국에서 훈련을 하면서 [[하승진]]과 함께 지내며 훈련을 했었고 [[방성윤]]과도 연습경기에서 몇차례 안면을 틔웠다고 한다. 하승진이 말하길 '한국인 빈스 카터로 방성윤보다 3점이 좋고 덩크는 흑인들보다 잘한다.' 라는 코멘트를 하면서 기대감을 증폭이었다.] 급기야 수만명 규모의 팬카페가 개설되고 NBA와 KBL 드래프트 신청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면서 각 커뮤니티에서는 몇 년간 그 기량에 대한 갑론을박으로 논쟁이 심심할만하면 일어났다.[* 용병급 플레이어가 온다는 과대평가성 루머가 돌고 극성 팬들이 기존의 선수들을 폄하해서 눈총을 받는가 하면 아직 선수급조차 아니라는 의견마저 있었는데 스타일상 예나 지금이나 항상 고평가와 저평가의 온도차가 극심한 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