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까오다이교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응오 반 치에우.jpg]] 창시자 응오민찌에우(1878-1932) 프랑스 식민 시절 응오민찌에우(Ngo Minh Chieu, 본명은 응오반찌에우)가 동서양 종교 서적을 탐독하고 베트남 민족에 맞는 종교를 창시하게 되는데 1919년부터 신자를 모집하기 시작했고 1926년에 공식적인 종교가 되었다. 이 종교는 1930년대~1956년까지, 베트남 남부 지역에서 호아하오교와 함께 내셔널리즘의 핵심을 담당했다. 당시 까오다이의 교주 [[https://en.wikipedia.org/wiki/Ph%E1%BA%A1m_C%C3%B4ng_T%E1%BA%AFc|팜꽁딱]]은 프랑스에 의해 [[마다가스카르]]로 유배되었으나, 쩐꽝빈 장군이 대신 까오다이교 신자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군과 싸웠다. 이때 베트남의 많은 반공 무장 독립운동 세력과 마찬가지로[* 베트남 국민당 제외. 이들은 [[중국 국민당]]과 동맹이었기에 일본과 적대 관계였다.] 일본군과 협력 관계를 맺고 일본군에서 까오다이군의 훈련을 지원하기도 했으나, 1945년에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1947년, 베트민은 함께 프랑스에 맞서 싸우자는 거짓된 약속을 깨버리고 혼자 권력을 장악하려는 본심을 드러내었고, 곧이어 주요 비공산주의 내셔널리즘 세력들의 수장을 연이어 공격하기 시작한다. 호아하오교의 교주 [[https://en.wikipedia.org/wiki/Hu%E1%BB%B3nh_Ph%C3%BA_S%E1%BB%95|후인푸소 Huỳnh Phú Sổ]]가 베트민에게 납치당해 사망한 것처럼, 까오다이교의 군사 지도자 쩐꽝빈 역시 베트민에게 납치당했다. 하지만 그는 후인푸소와는 달리 목숨은 건지는 데 성공했고, 쩐꽝빈은 결국 베트민을 베트남의 더 큰 위협으로 여기고 프랑스와 협력 관계를 맺기로 결정한다. 교주 팜꽁딱 역시 1946년 베트남으로 복귀한 뒤 쩐꽝빈과 같은 결정을 했다. 까오다이교 군벌 지도자들 상당수는 이 결정에 따랐으나, 이에 안 따른 젊은 장교가 하나 있었는데, [[찐민테]]라는 인물이었다. 이렇게 45년까지의 반불 독립운동과, 이후 반공 민족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까오다이교였으나, 55년에 큰 시련을 겪게 된다. [[응오딘지엠]]이 독재자로 각성하면서 정치적 동맹이었던 혁명 위원회(Revolutionary Committee)를 숙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팜꽁딱은 캄보디아로 망명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59년에 사망했다. 까오다이교는 살아남았으나 지역 조직력과 군사력, 그리고 유망한 정치적 지도자들까지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가장 유명한 찐민테는 종교파 숙청이 시작되기도 전 55년 5월 3일, 사이공 전투의 와중에 암살당했고, 그의 부관 니락은 팜꽁딱과 마찬가지로 캄보디아로 망명한다. 응우옌타인프엉은 63년 쿠데타까지도 살아남아 있었으나, 팜꽁딱이 캄보디아로 쫓겨나게 되는 데 너무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탓인지는 몰라도, 이미 인기를 상실해서 까오다이교인들의 정치적, 군사적 구심점은 전혀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캄보디아 국경 지역에서 공산주의 진영을 상대로 남베트남을 지키는 요새 역할을 하던 까오다이교의 역량을 최종적으로 무너트린 것은 응오딘지엠이었다. 까오다이교의 이러한 역사는 당연히 북베트남 정권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고, 따라서 통일 후 [[베트콩]]을 지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통일 후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젊은 신자가 잘 유입되지 않아 신도층의 [[고령화]]가 상당히 진행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