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꽝쭝 (문단 편집) ==== [[시암]]군을 격파하다 ==== || [[파일:시암 전투 승리를 기념하는 서산 동상.jpg|width=400]] || || 서산-시암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동상 || 완왕은 연이은 패배에도 재건을 포기하지 않고 [[프랑스]] [[선교사]] 피뇨[* Pigneau de Béhaine, 百多祿(백다록, 1741.11.2 ~ 1799.10.9). 프랑스 선교사로 완복영을 지원했다.]에게 자신의 큰아들 경[* 阮福景(완복경, 1780 ~ 1801).]을 맡기고 도움을 청했다. 프랑스에 이어 시암에도 도움을 청했고 서산의 확장을 염려하던 시암왕 [[라마 1세]]가 동의하여 지원군을 얻어냈다. 마침내 1784년 시암-프랑스[* 피뇨가 사비를 털어 지원한 용병(비정규군)들이다.]-완주 연합군과 대 서산 전쟁이 시작되었다. 먼저 라마 1세는 캄보디아의 섭정 소피에를 파견해 서산이 점령한 가정을 공격하게 했고 7월차엔 대장군 소증(昭曾), 소상률(昭霜率)를 주축으로 병사 2만, 전함 300척이란 엄청난 규모를 동원해 가정을 공격했다. 완복영도 시암군과 참전했고 시암-완 연합군은 서산의 차온(茶溫)을 비롯한 2개의 현을 점령한다. 이에 서산군수직 장문다(張文多)가 놀라 서산 수뇌부에 지원을 요청해 태덕의 명으로 완혜는 시암-완 연합군을 정벌하러 출발했다. 그러나 시암의 압도적인 물량에 패배에 몰리자 항복을 고려했지만 충신 여춘각(黎春覺)의 설득으로 항복 계획을 내던지고 전략부터 다시 세우는 근성과 치밀함을 보여줬다. * 시암군의 주요 진격지인 미토시(美湫市)에 복병을 주둔시킨다. * 서산군 일부를 파견해 시암군을 유인한다. 보기좋게 시암군이 재차 공격하자 서산군은 수로를 따라 시암군을 유인했고 주둔시킨 서산 복병들이 있던 곳으로 가자 포병의 맹렬한 공격에 시암군은 궤멸 직전까지 갔고 이 틈을 타 완혜의 수륙부대는 시암군을 완전히 격파시켜 대월을 지켜냈다. 또 패배한 완복영은 마지막 세력권까지 뺏긴 후 식량도 없이 측근들만 데리고 시암으로 도주했다. 이 대전쟁을 계기로 완혜의 군사력에 두려움을 느낀 시암은 완혜를 '서산의 호랑이'라 칭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