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꽝쭝 (문단 편집) ==== 사망 ==== || [[파일:가륭제(세조).jpg|width=220]] || || 숙적 [[완복영]] || 1787년 오랜 숙적 [[완복영]]은 마침내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하고 프랑스의 후원을 기반으로 서산에 다시 대항하였다. 피뇨를 통해 지원받은 프랑스군과 신식 무기로 대월을 침략한단 소식에 완혜는 그를 섬멸하겠다는 격문을 내세웠으나 하늘이 무심하게도 그는 40세의 이른 나이로 한참 중요한 상황에 사망해버렸다. 그의 사망에 관해서 여러 기록이 전해지는데, 완혜가 부춘을 정벌할 당시 완씨 제후왕들의 무덤을 도굴했고, 그 영혼들이 노해 병을 얻었다고 한다. 현대에선 그의 사인을 [[뇌졸중]]으로 보고 있다. 완혜가 급히 진광요를 불러 도성 천도에 대해 의논하였으나 완복영의 군대가 여러 군데를 점령했다는 소식에 병세가 더욱더 깊어져갔다. 자신이 죽으면 10살밖에 되지 않은 태자가 즉위할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가시지 않았고 임종 전 진광요를 비롯한 신하들에게 아들을 도와줄 것을 바라니 신하들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사후 묘호는 태조 무황제로 정해졌다. 능의 이름은 단양릉(丹陽陵)이고 하늘에 가깝다고 생각한 곳에 두었다. 청은 그에게 충순(忠順)이란 시호를 내렸고 친히 그를 위해 묘비명을 작성하였다. 형인 응우옌반냑도 이듬해 죽었다. 광중의 푸쑤언 정권에서는 [[응우옌꽝또안]]이 뒤를 이어 즉위, 서산을 통일하지만 이미 내분과 분열로 인해 힘을 잃은 뒤였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1802년 수도 탕롱이 완주에게 점령당하면서 서산조도 동시에 멸망하였다. 서산 황족들은 모두 순화로 압송되어 처형되었고 태덕과 광중의 유해는 완복영에 의해 [[부관참시]] 당하는 수모를 맞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