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꽝쭝 (문단 편집) == 후대의 평가 == 현대 베트남에서는 '''위대한 위인이자 민족영웅'''으로 크게 추앙받고 있다. '농민 출신으로 사회의 밑바닥을 경험하며 구체제에 회의를 느낌' + '구 체제를 멸하고 새 왕조를 일으켜 농민들을 위해 사회 개혁정책을 폄' + '청나라의 대군을 격파하고 옛 남월의 땅이었던 곳까지 수복할 계획까지 세움' + '그러나 뜻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고 39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사망'.[* '후계자가 뻘짓을 해서 금방 망함'은 요소가 아니다. 어린애가 뭘 할 수 있었겠는가?'] 인기요소가 엄청나게 많을 수밖에 없다. 정작 경쟁자이자 최후의 승리자 [[가륭제]]가 과거 응우옌씨 정권의 후예로서 결국 구 왕조들의 폐단을 그대로 반복했다가, 가륭제 사후, 프랑스의 침입을 초래했다는 점으로 비판을 받고 베트남에서 아예 연구 대상으로 취급하지도 않는 것과는 대조되는 점이다. 후에 집권한 [[응우옌 왕조]]가 불과 60년만에 베트남 남부와 중부 지역의 통치권을 프랑스에게 내주고, 일단 사직은 보전했다지만, 실제 통치권의 많은 부분을 프랑스 식민당국이 가져가게 되면서 많은 베트남인들이 프랑스 식민 치하에서 착취를 당하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아쉬움이 커질 수밖에 없기도 하였고, 마치 떠이선당의 난 이후에 이를 영웅시 해줄 인물이 약 150년 뒤에 나타나서 사회주의, 민족주의, 농민 기반 월맹 정권을 만들어주었다는 듯이 현대의 베트남 국가 이념의 관점에선 영웅적인 상징성을 가진 인물이고, 또한 비단 공산주의적인 성향을 지니지 않더라도 많은 개혁정책을 단행했다는 점이나 중국, 태국 등 외세세력을 잇따라 격파했다는 점이 베트남 내 민족주의자들이나 일반인들에게도 많은 호감을 얻었기에 재조명 자체는 19세기부터 시작되었고 구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에서도 [[쩐흥다오]], 레 반 후에와 함께 지폐 도안에 넣었을 정도였다. 서산조가 당대 아시아권 왕조들 중에는 상당히 진보적으로 종교적 자유를 보장했다는 점에서 종교에 수많은 탄압을 가하는 등 폭압적이었던 북베트남을 비판할 때 들고 나오기 좋은 왕조기도 하다. 영웅적인 사관에서 벗어나서 응우옌반후에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거나 토론하는 것이 요원해보이기는 한다고는 하지만 응우옌 왕조가 못해보이는 것은 사실이고, 현대 베트남 자체가 부실한 경제기반에도 일본, 프랑스, 미국, 중국 등 여러 패권국을 잇따라 승리한 경험이 있는지라 이러한 경험을 보고 들은 베트남 일반인들 입장에서 가륭제보다는 꽝쭝에게 더욱 호감이 가는 것이 당연할테니 더더욱 높이 평가해줄 수밖에 없기는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