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꿀 (문단 편집) == 역사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Z2vdWBO6N2c)]}}}|| 인간이 벌꿀을 얻기 시작한 것은 최소한 8천년 전부터다. 스페인의 한 동굴에 인간이 벌꿀을 채집하는 모습을 그린 벽화가 있는데, 이 벽화가 8천년 된 그림이기 때문. 즉 더 오래전부터 인간이 벌꿀을 얻어왔을 수도 있는 것이다. 벌이 열심히 꽃을 돌아다니며 꿀을 모으는 것은 바깥에서 돌아다니다보면 쉽게 관찰할 수 있고, 자연상태의 [[벌집]]을 까면 꿀이 있다는 것은 사람이 아닌 [[곰]]도 잘 아는 사실이니만큼 인간 역시 선사시대부터 벌침을 감수하고 채집했을 것이다. 동양에서는 [[백제]]의 마지막 왕자 [[부여풍]]이 일본에서 [[양봉]]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다. [[설탕]]이 개발/수입되기 전에는 [[조청]] 등과 함께 단맛을 내는 얼마 없는 수단이었고, 그나마 서민들이 구하기 쉬운 단 것이었다. 지금도 쓰이고는 있지만 설탕보다 단가가 비싸고 특유의 향이 원재료의 맛을 약하게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비율을 두고 사용하는 것이 기본. 꿀에 든 과당은 자당[* 설탕에 들어있는 당. 혹은 설탕 그 자체]에 비해 압도적인 단맛을 내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음식에서 꿀맛밖에 안 나는 참사가 일어난다. 북유럽에서는 꿀을 발효시켜서 [[벌꿀술]]을 만들어 마시기도 했으며, [[북유럽 신화]]에서도 벌꿀술이 자주 언급된다. [[중세]]까지는 수도원에서 초를 만드는 밀랍을 채취할 때 나오는 부산물이라서 꿀이 설탕보다 가치가 낮았는데, [[종교개혁]] 이후 수도원이 줄어들고 설탕 수입이 많아지자 주로 [[유럽]] [[개신교]] 지역과 무역이 활발한 지역에서 꿀이 더 귀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중세에는 설탕이 흔히 보기 힘든 귀중품이었다는 것도 한몫한 결과이긴 하다. 그래도 만드는 데 품이 많이 들어가므로 당장 내일 먹을 빵이 고민인 사람들에게는 사치품에 속했고, 양봉업자가 아닌 이상은 돈 많은 상인이나 귀족들 정도만 먹을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출간된 <컬러일러스트레이션 세계생활사> 중 중세유럽의 생활사에는 "벌통에서 2년에 1번 꿀을 얻는게 고작"이었단 대목도 있다. 벌통에서 꿀을 채취하면 꿀벌들이 겨울 동안 굶어 죽기 때문에 설탕물을 사료로 줘야하는데, 중세에는 설탕물이 꿀보다 비싸니 줄 수 없고, 벌통을 첫 1년은 꿀을 채취하지 않고 분봉하게 냅뒀다가 분봉해서 새 벌통이 생기면 기존 벌통을 채취하는 식이었다. 애초에 종류를 불문하고 근대 이전의 감미료는 기본적으로 엄청난 사치품이었다. 이 말은 꿀의 가치가 낮았다는 게 아니라 설탕의 가치가 아주 높았다는 얘기다. 과거 산업 혁명기, 유럽 열강들이 카리브 해 등의 식민지에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들을 건설하면서 생산량을 폭발적으로 늘리기 전까지는 설탕이 꿀보다 비쌌다. 독일 법전에는 유난히 벌과 관련된 조항들이 많이 보인다. 가령 우리 집에서 기르던 벌들이 옆집의 벌집으로 날아갔을 때[* 분봉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현대 양봉업에서도 방심하면 일어나서 양봉업자에게 손해를 입히는 벌들의 집단행동이다. [[양봉#s-4]] 문서 참고.] "이 벌은 누구의 소유인가" 하는 것들이 있는데, 이는 과거 로마 시절의 법전을 가져다 만들었기 때문. 로마 시절 양봉은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굉장히 선진적인 의학 지식과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는데, 벌꿀에 대량으로 함유된 [[프로폴리스]]가 강력한 항생 작용을 한다는 것 역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따라서 벌꿀은 일반 시민의 감미료뿐만 아니라 부상병 처치를 위한 군사 전략 물자로도 유통되었다.] 이 소유권이 얼마나 엄했는지 심지어 한 아이는 실수로 모자에 벌이 든 채로 있었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아야 했다. 기록으로는 '''모자를 숲에 둘지언정 벌을 갖고 와서는 안 되었다.''' 라는 식으로 되어 있다. [[꿀물]]을 원했으나 못 먹고 비참하게 최후를 맞은 역사적 인물로 그 유명한 [[원술]]과 [[양무제]] 소연이 있다.[* 이 둘은 황제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에서 공통점은 있으나 사후의 평가는 정반대이다. 원술은 동탁에게 옹립되고 조조에게 목숨줄을 틀어잡힌 허수아비였다지만 엄연히 한나라의 황제인 헌제가 살아있음에도 자신의 나라를 세운 역적 주제에 십상시와 동탁에 이어 이각과 곽사까지 이십여 년을 수탈당해 빈곤하기 그지없을 백성들에게 그 귀한 꿀물을 요구하다 죽었다. 반면 소연은 말년엔 실정이 있었을지라도 최소한 황제의 위엄을 지키고 있었으며, 황제의 거처인 정거전에서 [[후경]]의 반란으로 마땅히 먹을 수 있었던 꿀물조차 입에 대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는 비극적인 뉘앙스가 더 강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