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고르노카라바흐 (문단 편집) ===== [[글라스노스트]]의 혼란 =====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흐루쇼프]] 시대부터 이어지는 만성적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라 알려진 재건 정책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글라스노스트]]라 알려진 개방 정책을 추진한다. 하지만 고르바초프의 이러한 방향성은 그동안 억압되어 있던 소련 내부의 다양한 논제들을 수면위로 끌어올림과 동시에 [[캅카스]]에서는 민족 갈등의 재점화를 낳으며 고르바초프가 당초 상정하지 않았던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한다. 1987년까지 이 문제는 서명운동과 청원운동 등 정치행위에 그치는가 싶었으나 1987년 10월 사태 악화의 첫 원인들 중 하나가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예레반에 아제르바이잔(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바깥이다) 협동농장에서 아제르바이잔의 지배에 불복종한 아르메니아인들이 린치당했다는 뉴스가 퍼지자 예레반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나고, 아제르바이잔에 적대감을 보이는 수천의 시위대가 거리를 뒤덮는다. 1988년 2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의 수도인 스테파나케르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은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르메니아에 합병할 것을 청원하는 시위를 벌인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소비에트는 이를 결의하였고 아르메니아 SSR로 병합되기 위해 소련 최고 소비에트에 청원을 넣는다. 같은 시기 예레반에서는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병합을 원하는 민족주의적 시위와 총파업이 벌어졌다. 이러한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소련군이 파견되었으며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는 순식간에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양국은 각자의 영토에서 포그롬의 물결을 일으켰고 쌍방간의 민족 추방이 이어졌다. 아르메니아의 영토 할양 요구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여러 차례의 민족 박해가 이루어졌는데, 이 중 가장 특기할 만한 사건은 아제르바이잔의 숨가이으트(Sumgait)에서 발생한 반아르메니아인 포그롬이었다. 아제르바이잔 청년 2명이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외곽에서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살해당했다는 뉴스가 바쿠에 퍼지면서 여러 도시에서 산발적인 폭동이 발생했는데, 그 중 숨가이으트에서는 2월 27일에서 29일에 걸쳐 아르메니아인 주거지구에 대한 파괴행위가 일어난다. 이 도시에서의 폭동으로 발생한 총 32명의 사망자 중 26명은 아르메니아인이었으며, 이에 따른 수백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 다음으로 [[간자]]에서 발생한 1988년 11월의 반아르메니아인 폭동을 꼽을 수 있다. 1988년 6월 15일 아르메니아 최고 소비에트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병합을 승인하는 투표를 진행한다. 아제르바이잔 SSR은 다음 날 즉시 나고르노카라바흐를 포기할 의사가 없음을 천명하였으며, 1988년 7월 소련 정부는 아르메니아측의 나고르노카라바흐 할양 요구를 거부한다. 이로부터 2개월 뒤인 1988년 9월, 스테파나케르트에서 안티아제르바이잔 포그롬이 발생해 수도부의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박해받고 모두 추방된다. 소련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89년 1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를 모스크바 직할령으로 조정하였으나 아르메니아의 총파업과 두 민족의 쌍방 충돌은 멈추지 않았다. 소련군은 1989년 5월 스테파나케르트에 기갑 부대를 배치해 이를 진압해 보려 했으나 그 마저도 소용이 없었다. 소련은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아르메니아인들을 달래기 위해 자치권을 확대하고 체포된 나고르노카라바흐 분리주의자 일부를 석방하며 ANM(Armenian National Movement) 활동을 합법화한다. 고삐가 풀린 아르메니아인들은 같은 해 1월부터 직할령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지배하던 모스크바 인사들의 6인위원회를 전복시킨다. ANM은 모스크바가 임명한 인사들을 무력화하고 8월 16일 불법 선거를 통해 78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자체 민병대를 조직하기 시작한다. 지속되는 할양 요구와 분리주의적 준동, 자치주측의 불법적인 자체 선거 행위에 아제르바이잔은 1989년 8월 아르메니아SSR에 대한 보이콧을 선언하고 아르메니아SSR과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를 연결하는 철도를 봉쇄한다. 이 조치는 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의 활성화를 불러왔고, 이들은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모스크바의 명목상의 직할통치에 대하여 반발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모두가 모스크바의 통제를 따르지 않게 된 이상, 이는 소련 당국이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이로부터 3개월 뒤인 1989년 11월 모스크바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직할 통치를 철회하고 행정권을 자치주 당국에 반환해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의 호의를 이끌어내었다. 1990년 1월 소련군은 12,000명의 병력을 대동하여 인민전선 분쇄와 폭동 진압을 위해 바쿠를 공격한다. 아제르바이잔인들은 포그롬으로 아르메니아인 68명 가량을 죽였고, 소련군은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잔혹한 무력을 행사하여 100명 이상의 비무장 아제르바이잔 민간인을 죽인다. 1월 13일부터 이틀간 벌어진 폭동으로 추산 5만 명 전후의 바쿠 거주 아르메니아인들이 도시를 떠난다. 인민전선의 저항은 1월 20일까지 이어졌으며 소련군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바쿠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 시기 소련군의 바쿠 민간인 학살에 대하여 검은 1월이라는 이름을 붙여 희생자들을 기린다. 같은 시기인 1990년 상반기동안 아르메니아는 소련군에 대항하는 독자 군대를 비공식적으로 설립하여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장악하고 [[나흐츠반 자치공화국]]을 침공해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시킨다. 여러 민병대가 난립한 가운데 가장 거대한 세력은 5000명 규모의 ANA(Armenian National Army)였다.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인 바쿠가 소련군의 탄압에 시달리는 가운데 이들은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를 마음껏 휘젓고 다니며 역량을 키울 수 있었다. 하반기에 이르면 나고르노카라바흐가 아닌 아르메니아 SSR부터가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하는데, 고르바초프는 휘하 공화국들의 자치권 확대와 소련의 유지를 골자로 하는 신연방조약을 짜기 시작한다. 그리고 1991년 8월, 모스크바 보수파들의 쿠데타가 무산되며 소련 공산당 기능이 정지한다. 이로부터 한 달 뒤인 1991년 9월, 소련의 영향력이 사라진 이 지역에서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는 공화국 설립을 선언하고 자신들이 더이상 아제르바이잔의 관할 아래 있지 않음을 선포한다. 아제르바이잔은 2개월 뒤인 1991년 11월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자치주 지위를 폐지하며 이에 반발한다. 1991년 12월 10일,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소비에트는 아제르바이잔을 배제한 일방적인 독립 국민투표를 진행한다.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아제르바이잔인이 보이콧한 가운데 99.98%의 찬성률로 자치주는 독립을 결정한다. 그리고 1991년 12월 26일, 소련이 [[소련 해체|해체]]된다. 참고자료 : - Human Rights Watch/Helsinki, , New York : Human Rights Watch, 1994 - Michael P. Croissant, , 1998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