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노리 (문단 편집) == 해외의 유사 사례 == '동시대'의 다른 아시아권에서는 한참 전에 사라진 풍습이다. 훨씬 이전인 [[삼국지]]에서는 [[일기토]]에서 목 좀 베어 봤다 하는 장수들이면 나노리와 비슷한 자기소개를 한다. 대표적인 예가 [[장비]].(예: "[[여포|애비성을 셋이나 가진 천하의 상놈]]아! [[연(춘추전국시대)|연]]인 장비가 여기 있다! 나와서 나와 자웅을 겨뤄보자!") [[고대]] [[한국]]에서도 [[삼국시대]] 때 [[고구려]]의 장수와 [[백제]]의 태자 [[부여창]]이 [[백합야 전투]]에서 신상명세를 알리며 통성명(通姓名)을 하고 일대일 단기접전(單騎接戰)을 치르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한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각에서는 고대 백제와 일본 간의 긴밀한 연관성을 들어 한반도의 통성명과 단기접전 풍습이 일본 열도로 전해져 나노리와 일기토가 되었다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정확하게 밝혀진 사실은 아니다. 본 항목에서도 세계 각지의 유사한 사례를 소개하고 있듯이 경우에 따라 쉽게 자생할 수 있는 풍습이기 때문. 다만 문화가 항상 그랬다시피 자생적으로 발생한 후에도 교류를 통해 영향을 주고받았을 수는 있다.] 이후 [[통일신라]]와 [[발해]]가 서로 대치하긴 했으나 군사적인 대립보다는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것을 택한 데다가 [[중앙집권제|중앙집권]]도 일찍 시행하였으니 시대가 흐르며 점차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중세]] [[유럽]]에서도 영주들 간 전투가 벌어질 때 [[기사(역사)|기사]]들이 전쟁터에서 출자를 밝히며 자신이 가진 작위나 기독교의 수호자라는 미사여구를 붙이는 풍습이 있었다.[* 방패가 전략적으로 큰 효율이 없다는 게 밝혀졌을 때에도 기사들은 항상 방패를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방패가 [[신분증]]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한 가문의 문장 따위가 그려져 있다.] 이후 유럽에서 [[기사도]] 문화가 쇠퇴하고 [[중앙집권제|중앙집권]]적인 근대 국민국가가 탄생하고 전쟁이 총력전 양상을 띄기 시작하는 16~17세기 무렵 이러한 풍습은 전장에서 사라졌다. 이후 에도 시대 일본처럼 개인 간의 결투가 벌어질 때 결투 시작 직전 자신의 이름과 명분을 밝히는 경우로 살아남았으나, 19세기 중엽부터 영국을 시작으로 근대적인 형법 체계와 사법 제도가 도입되고 사회적인 분위기 또한 변화하면서 결투 자체가 사라졌고, 싸움에 앞서 자기 소개를 하는 풍습도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