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당전쟁 (문단 편집) ==== 군사·기술 분야의 준비 ==== 나당전쟁을 준비하며 신라의 첩보 활동이나 정보 수집 능력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는데, 669년 5월 지진산을 보내 당나라에 자석을 바치고, 그 해 겨울 복한(福漢)을 당나라로 보내 목재를 바친 것도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정보를 수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나라 역시 신라의 기술자 [[구진천]](仇珍川)을 당으로 데리고 가는 등, 669년에는 나당간의 본격적인 정보 수집과 군사기술 획득을 위한 첩보전이 활발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노 제작 기술자인 구진천이 당으로 갔던 것은 신라의 [[쇠뇌|노]]가 우수한 성능을 가졌기 때문이며, 이러한 노의 성능 개량은 문무왕대에 무기 발전 정책을 추진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신라는 병부에 노사지(弩舍知)와 노당(弩幢)이라는 관직을 설치하여 노에 대한 생산과 관리를 전담시킬 정도로 적극적으로 배려했다.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구진천은 조국 신라를 위해 끝까지 비법을 숨겼다. 처음에는 신라의 자재를 쓰면 잘 될 것이라며 시간을 끌다가 나중에는 [[나무]]가 [[바다]]를 건너는 도중 [[습기]]를 너무 많이 먹어 성능이 형편없게 나왔다고 끝까지 버텼다. 이에 노한 당나라에서 온갖 협박을 가했지만 끝까지 신라 쇠뇌의 기술을 유출하지 않았다.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8913|#]][* 결국 중국의 경우, 기록상에 사거리가 1,000보 가는 노에 대한 첫 기록은 [[송나라]] 시대의 상노(床弩)였다.] 또한, 위에서 서술한것처럼 이 시기에는 174개의 목장을 재분배하였는데 이는 신라의 기병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670~680년대 신라의 급진적인 기병 증설은 669년 목장 재분배와 이를 받은 진골 귀족들의 참여를 상정해 볼 수 있다.[* 서영교, <신라 통일기 기병증설의 기반> 《역사와 현실》] 언급한 사항들과 위의 표를 참조하여 보면, 신라는 늦어도 668년 하반기부터는 이미 당나라에 대한 전략을 수립하여 일본에 외교 사절을 파견하였고, 669년은 전쟁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철저하게 전쟁 대비를 했으며, 670년 초에는 요동을 목표로 선제 공격에 나섰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신라는 이러한 철저한 전쟁준비를 바탕으로 하여, 전격적인 요동 선제 공격과 백제 고지에 대한 타격을 감행, 나당전쟁의 초기 주도권을 장악해나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