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당전쟁 (문단 편집) === 임진강을 두고 대치하다 === 674년은 임진강선을 중심으로 대치가 장기화되어 양국 간에 큰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문무왕은 부흥군의 소멸로 오갈 곳 없는 고구려 유민들을 거둬들여 옛 백제 땅을 수비하게 했다. 이에 격노한 당 고종은 형 문무왕이 멀쩡히 있는데도 당시 당나라에 있었던 동생 [[김인문(신라)|김인문]]을 문무왕 대신 명목상의 신라왕으로 책봉해 신라로 보내버리기도 했다. 중간에 끼인 김인문은 일단은 간곡히 사양했지만 어쩔 수 없이 보내졌는데 실제론 문무왕이 신라를 다스리고 있었고, 김인문도 할 생각이 없었기에 실질적인 효과는 없었다. 또한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고 이필, 이근행에게 보좌하게 해 신라를 공격하게 했는데 이 군대는 675년에야 도착했다. 674년 동안 신라는 여러 차례 군을 사열하고 '''[[육진병법]](六陳兵法)'''을 연마하는 등 전쟁 대비를 철저히 했다. 675년 2월, 유인궤의 당군이 도착해 신라의 칠중성을 깨뜨리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유인궤의 '''칠중성 공략'''은 당나라에서도 적지 않은 군공으로 여겼는지 유인궤는 귀환했을 때 작위가 [[공작(작위)|공작]]으로 올랐고, 재상급 지위인 [[좌복야]]에 임명되었다. 이후 칠중성은 이근행이 방어했으나 [[매소성 전투]] 전후의 기록을 보면 곧 신라군이 탈환한 것으로 추정된다. 분이 안 풀린 당 고종은 이근행에게 다시 신라를 공격하게 했고, 이에 문무왕은 당에 사신을 파견해 공물을 바치고 사죄했는데 그제서야 약간 분이 풀린 당 고종은 문무왕의 관작을 회복시켜주고 군사를 물렸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문무왕은 군대를 보내 백제 땅에 주둔하던 당군을 공격하여 물리친 다음 백제 전토를 수복하였고, 옛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백제 땅을 상실한 당은 다시 격노하여 신라로 군대를 파견하기로 한다. '''이 정도면 문무왕은 가히 [[화전양면]] 전술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