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당전쟁 (문단 편집) == 배경 == [[삼국시대]] 말기 당시 신라는 주로 [[백제]]와 대립하는 관계였다. 643년 [[고구려]]가 [[태종 무열왕|김춘추]]의 동맹 제의를 묵살하고, 오히려 백제와 손을 잡아 여제동맹을 결성하자, 647년에 김춘추가 왜국을 찾아가지만 역시 뚜렷한 외교적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그렇게 신라는 주변국 중 아군을 찾을 수 없어 [[원교근공]]의 전략하에 당나라에 도움을 구했다. [[진덕여왕]]이 [[당나라]]에 보낸 <[[치당태평송]]>이라든가 당나라의 [[연호]], 복식 등을 도입한 것을 보면 이미 [[왜국]]과 [[고구려]]와의 외교에 실패한 [[신라]]가 마지막 동아줄을 잡는 당시의 절박한 심경이 상당히 드러난다. 결국 이 같은 노력은 결실을 맺어, 나당연합군은 660년 동서로 협공해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대야성 전투(642년)|20년 전 백제군에 의해 참살당한]] [[고타소|딸]]과 [[김품석|사위]]의 원한을 아직도 잊지 않은 [[태종 무열왕]]은 [[의자왕]]에게 친히 자신에게 술을 따르게 함으로서 원수를 갚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신라를 기선제압하기 위해서 당군 총사령관인 [[소정방]]은 신라의 선봉장 [[김문영]]이 약속시간에 제때 도착하지 못한 것[* [[황산벌 전투]]에서 보여줬듯이 백제군의 결사대 5,000명의 저항이 예상보다 컸기 때문이다.]을 이유로 목을 베라고 명령했는데 [[김유신]]이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도끼를 들고 당군 진영으로 달려가서 소정방에게 '''"지금 당장 그 명을 무르지 않으면 우리 신라는 고구려보다 니네 당나라를 먼저 칠 것이다!"'''라고 강력히 항의하면서 겨우 무마시키는 사건이 있기도 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황산벌(영화)|황산벌]]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묘사된다.] 이 사건은 비록 나당동맹 관계에 있지만 신라가 순순히 당나라의 뜻을 따르지만은 않겠다는 의지를 표출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나당연합군|나당동맹]]은 계속되어 [[668년]] [[고구려]]까지 쓰러지자, 당은 내친 김에 한반도 전체에 발을 뻗으려는 마각을 드러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