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당전쟁 (문단 편집) === 냉전 === 신라와 당은 크게 전쟁을 벌여 사이가 나빠졌기 때문에 676년 이후에도 수십년간 거의 [[단교]]에 가까울 정도로 교류가 줄어들었다. 당은 이 전쟁으로 신라가 획득한 옛 고구려, 백제 영토에 대해 신라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명목상 고구려 고씨, 백제 부여씨 왕실 유족을 당나라 수도 장안에 거주시키며 이들을 '고려 조선왕',[* 여기서 조선은 후대의 이성계가 세우는 조선이 아니라 [[고조선]]과, 고조선의 중심지였던 [[평양]]과 주변 일대의 지명처럼 사용된 것이다.] '백제 대방왕'으로 대우하였다. --정신승리-- 나당전쟁이 끝나고 거의 50여년이 지난 725년 11월, [[현종(당)|당 현종]]은 [[태산]]에서 [[봉선]]의식을 거행했는데 이때도 일본, 신라, 말갈인 사신 외에 고구려, 백제 왕가의 유족을 굳이 왕으로서 참여시켜서 마치 고구려와 백제가 (당의 속국으로) 아직 존재한다는 퍼포먼스를 해 신라를 압박했다. 물론 8세기에 고구려와 백제가 영토를 가진 국가로서 존재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신라나 일본 등과 달리 내번(內蕃) 자격으로 참석했기 때문에, 이 기록을 자세히 본다면 이미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해 사라진 것을 당나라도 인지하고 있었다는 근거가 된다. 이들은 당나라가 통일신라를 재공격했을 때 꼭두각시로 사용하기 위해 아직 데리고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725년까지도 당나라는 한반도 재침공 계획을 폐기하지 않고 있었음을 말한다. 물론 이 시기에 고구려 고토에는 [[발해]]가 세워진 이후였는데 이 시기의 당은 신라는 물론 신생국 발해와도 사이가 나빴으므로 신라의 삼한일통과 국가로서의 발해를 모두 승인하지 않겠다는 제스처로도 볼 수 있다. 신라 역시 이에 대항해 나당전쟁 이후로도 한때는 적이었던, 하지만 이제는 반당이란 뜻이 일치하는 일본과 사신을 역대 최대로 활발하게 주고받으면서 후방을 다졌고, 내부적으로도 군사 제도를 개혁하며 군비를 강화하는 등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당나라와 약간의 교류는 있었지만 이 역시 당나라의 요구를 신라가 대놓고 거절하는 등 불편한 관계가 계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