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당전쟁 (문단 편집) == 의의 == [[삼국통일전쟁]]은 한국사에서 가장 거대한 영향력을 끼친 전쟁 중 하나다.[*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9] 이 삼국통일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 바로 나당전쟁이다. 나당전쟁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와 당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669년~676년 동안 7년에 걸쳐 벌인 전쟁이었다. 결과적으로 신라가 당나라를 꺾음으로서 삼국통일을 이루게 되었지만 만일 당나라가 신라마저 정복하고 한반도 전역이 중화권 역사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면 한민족이 다시 세력을 회복하고 한반도를 통치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수 있다. 당나라의 [[한반도]] 정복 계획과 신라의 삼국통일정책이 정면으로 충돌한 전쟁이다. 당시 상황을 보면 [[당나라]]는 최전성기를 맞은 [[동아시아]] 역사상 최강국가 중 하나였지만, [[신라]]는 이제 막 삼한을 통합하기 직전의 국가였다. 그러나 전장이 신라의 본토 [[한반도]]라는 점은 신라의 강점이었다. 전성기에 이른 당나라의 대규모 군대에 맞서는 신라군은 수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훨씬 열세에 있었지만 [[문무왕]]과 신라군 수뇌부의 뛰어난 지략 및 [[전략]], [[전술]]로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당군을 격퇴하면서 승리할 수 있었다.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 통합은 이 시기에 사실상 이루어졌다. [[당나라]]가 옛 [[고구려]]의 [[수도(행정구역)|수도]] [[평양성]]에 설치한 [[안동도호부]]를 나당전쟁 결과 요동으로 축출함으로써 당나라의 통치력을 한반도 밖으로 쫓아내는데, 사실 [[대동강]]과 [[임진강]] 사이의 패서 지역은 신라 하대에 북상하기 전까지는 고구려계 소영주, 호족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681년에 신라가 고구려의 정천군([[강원도]] 덕원, 현 [[원산시]]의 일부)을 점령했다고 나오는데, 고구려 본국은 668년에 이미 망했으므로 여기서의 고구려는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이거나 왕실 몰락에 관계없이 일대에 남아있던 고구려 잔존 세력으로 본다.][* 사실 신라 하대의 황해도 개척 이후에도 이 일대에는 느슨한 행정망을 구축하고 고구려계 호족들이 상당한 자치를 누렸던 것으로 보이며,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개성 왕씨도 이런 고구려계 호족 중 하나인 것으로 추측된다.] 즉, 신라가 직접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세력이 차지하지도 못하는 완충지역으로 만든 것이다. 이 지역(패강)에 신라의 직접 통치력이 미치게 되는 건 [[선덕왕]] 부터의 일이며, [[헌덕왕]] 때에는 오늘날 황해도의 동쪽 절반인 재령강 이동강까지 군현 설치 및 축성 사업이 완료되었다. 중국 역대 왕조 가운데서도 정상권의 [[강대국]]이었던 최전성기의 [[당나라]]와의 7년간에 걸친 [[총력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관심이 신라의 삼국통일이냐 아니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한민족]] 역사의 다른 전쟁들에 비해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나당전쟁은 자력으로 대당제국의 한반도 지배 야욕을 저지하고, 쫒아냈다는 데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지대하다. 한국인들은 신라가 승전했기에 그냥 그러려니하고 넘어가기 쉬우나, 나당전쟁은 오늘날로 치면 [[중견국]]이 어떤 나라의 지원군이나 경제적인 도움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초강대국]]과 1대 1로 싸워 물리친 것과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국력차를 지혜롭게 극복한 위대한 승리였다.[* 나당전쟁 무렵 당나라는 명실상부하게 아시아권뿐 아니라 세계적인 초강대국이었다. 그런 강대국을 상대로 신라는 어떤 외국의 도움도 없이 혼자 싸워서 결국 물리쳤으니,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이후 후대의 고려와 함께 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대접받았다.][* 나당전쟁보다 약 900년 후의 [[임진왜란]] 무렵, 조선 왕조가 세계 최강대국인 명나라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도 일본군을 상대로 쩔쩔맸던 일을 떠올린다면 외국의 지원군이 단 1명도 없이 혼자서 초강대국 당나라를 물리친 신라의 승리가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신라는 나당전쟁보다 수백 년 전부터 치열하게 계속 전쟁을 해왔기 때문에 그만큼 사회 분위기가 호전적이었고 오랜 전투 경험이 있는 노련한 군인들을 보유했던 반면, 조선은 건국 초기 이후로 계속 평화가 이어져 병사들의 전투 경험이 부족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굳이 현대사와 연결시키자면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제국주의 시대에 서구 열강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에티오피아]]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10년 간의 항쟁 끝에 소련군을 물리친 아프가니스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당나라는 신라에게 대동강 이남 지역을 넘겨주어야 했고, 698년 [[발해]]가 세워지면서 만주 일대까지 지배하지 못하게 된다.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열세인 국력에도 불구하고 당나라를 이길 수 있었던 건 고구려 원정 때보다 더욱 길어진 보급선, 고구려 원정 당시 한반도 내에서 군량지원을 책임지던 신라의 역할인 내응세력 부재, 이를 보완하려던 당나라 수군의 연이은 패전, 신라군과 옛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강력한 저항, 토번의 공격이었다. 그리고 신라와 당은 과거 고구려에 대한 것처럼 서로를 명백하게 멸망시켜야 할 적국으로 인식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전쟁을 지속할 당위성이 오래갈 수가 없어 사그라든 것도 있다. 이후 [[고종(당)|당 고종]]이 병상에 누워있다가 사망하면서 당이 내부적으로 국정이 혼란해진 데다가, 앞서 언급한 토번의 준동이 본격적으로 발생했다. [[티베트]]의 불세출의 [[명장]] [[가르친링]]이 등장해 당나라 장수들을 갖고 놀기 시작한 게 이때쯤이었다. 게다가 나당전쟁 기간 중 당과 토번의 충돌은 670년 [[대비천 전투]] 한 번뿐이어서 큰 영향을 줄 수 없었던 것에 반해 다시 당과 토번이 격돌한 것은 나당전쟁 종전 2년 후인 678년부터였으며 이때부터는 당과 토번 간에 벌어지는 격전의 횟수가 증가하여 [[양면전쟁|당에 가해지는 압박]]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설상가상으로 옛 고구려의 땅에선 [[고구려]]의 유민들, [[거란]], [[말갈]]족들이 당의 통치에 불만을 품으며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여기에 연이어 [[돌궐]] 제2제국이 무서운 속도로 몽골 초원을 장악하고, 당 본토를 공격했기 때문에 당 입장에선 신라를 발해의 견제책으로서 끌여들여야 할 이유도 있었다. 결국 당은 오히려 신라의 대동강 이남 지배권을 인정하고 협력을 요청했다. 이는 그전까지 당이 계림도독부 설치 명령 이후 신라를 대놓고 인정하지 않았던 것을 볼 때 상당한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당 - 신라와 발해 간 전쟁이 벌어졌으나 영주 말갈족을 끌어들인 [[발해]]는 요동을 제외한 옛 고구려 고토에 성공적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다 발해 역시 3대 [[문왕(발해)|문왕]] 때 당과 국교를 맺으면서 비로소 [[한반도]]와 [[당나라]] 간의 긴장 상황은 종결되었다. 이후 [[신라]]와 [[당나라]]는 다시 서로 어느 정도 친밀해졌으며, [[신라방]]과 같은 당 내에서의 거점도 여럿 형성되는 등 관계는 우호적으로 급반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