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당전쟁 (문단 편집) === 이후의 연구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mini-files.thinkpool.com/%EA%B9%80%EB%B6%80%EC%8B%9D.jpg|width=100%]]}}} || || {{{#000000 '''김부식(金富軾)과 삼국사기(三國史記)''' }}} || 나당전쟁 관련 기록은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가장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12세기에 간행된 《삼국사기》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하고 있으며, 이후 15세기의 《[[동국통감]]》(東國通鑑)과 18세기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도 신라 - 고려 정통론에 입각해 역사가 쓰여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실학자들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고 나섰다. 한백겸은 신라가 한반도 동남쪽에 안주하여 서북 일대를 포기했다고 봤으며, 《[[발해고]]》의 저자 [[유득공]]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 회의하였고('''[[남북국시대]]론'''), [[김정호]]는 아예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 김영하, 《신라의 삼국통일을 보는 시각》) 이후 일제 시기의 선학들은 나당전쟁 그 자체에 무관심했는데, 신라의 삼국 통일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신라의 통일전쟁의 끝맺음인 당나라 격퇴도 자연스레 애써 외면하고 의미를 축소했다. 나당전쟁 이후 신라가 삼국의 전 영토를 아우르지 못한 데다가, 698년 [[발해]]가 건국됨으로써 신라의 '통일'은 불완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다. 다만 '''신라의 삼국통일이냐 아니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나당전쟁 그 자체에 대한 연구나 논의는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편'''이다. 이는 [[삼국통일전쟁]] 항목을 참고하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