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당전쟁 (문단 편집) === 개전의 원인 ===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 아직 고구려와 본격적으로 싸우기 이전부터 영토 문제를 비롯한 당나라와의 여러 이익들이 상충되기 시작하면서, 신라의 불만은 점점 축적되어 갔다. 당에게 주권(군권)의 일부까지 바치다시피 하면서 전쟁을 수행했건만, 실익은커녕 위협까지 더 생긴 격이었으니 말이다. 특히 이런 불만 속에서 663년에 당 조정이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문무왕]]을 계림주 대도독으로 임명하는 등 어처구니 없는 행태를 보였다. 물론 실제로는 신라가 멀쩡히 존재했으니 구 백제 땅에 설치한 [[웅진도독부]]와 달리 당나라의 계림대도독부로 기능하는 건 아니었지만 상징적으로 당나라에 편입시킨다는 의도가 엿보이는 행위였다. 거기에 더해 이듬해인 664년과 665년에는 백제와 신라가 더이상 싸우지 않고 서로 화해하게 하는 '''웅령 회맹'''과 '''취리산 회맹'''을 억지로 맺게 했는데, 특히 665년의 취리산 회맹에는 이미 멸망한 백제의 왕자 [[부여융]]과 현직 신라왕인 문무왕을 [[유인원(당나라)|유인원]]의 참관하에 반강제로 참석시켜 맹세를 하게 했다. 그리고 이 맹세문을 <금서철계(=[[단서철권]])>에 기록해 반으로 나눠 신라의 [[종묘]]에 보관하게 했다고 한다. 이 사건이 신라 측에게 있어 심각한 문제였던 것은, 부여융과 문무왕이 당나라의 주선으로 회맹하게 되었다는 것이 결국 이미 멸망하여 당나라의 통제 아래 [[꼭두각시]]로 움직이고 있었던 백제(=[[웅진도독부]])가 신라와 동등하다는 뜻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신라에게는 옛 백제 영역으로의 침투를 막고, 여차하면 백제처럼 될 수 있다는 협박과도 같았다. 문무왕은 아직 당나라와 맞설 준비가 안 되었으므로 치욕을 감내하고 그대로 따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