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당전쟁 (문단 편집) ===== [[2000년대]]의 연구 ===== 이후 나당전쟁에 관한 연구는 2000년대 들어 국내 학자 서영교와 중국 학자 배근흥(拜根興)에 의해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먼저 서영교는 나당전쟁의 전개가 [[서역]](西域)의 전황과 맞물려 돌려갔다고 파악하여, 한반도에 국한된 시야를 [[동아시아]] 전체로 확대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669년 토번이 천산남로(天山南路)를 급습하자, 670년 4월 [[설인귀]](薛仁貴)가 이끄는 당의 주력군이 서역으로 투입되었고, 이에 670년 3월 신라군이 [[압록강]] 이북으로 진출할 수 있었으며, 675년 9월 매소성에 주둔하던 말갈족 출신 이근행(李謹行)이 말갈병을 이끌고 서역으로 이동하자 이듬해 나당전쟁은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즉 당대 동아시아의 '약소국' 신라는 서역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다가 당군 주력이 서역으로 이동하자 전쟁을 감행할 수 있었고, 이후 당군 주력이 이근행을 따라 서역으로 이동하여 나당전쟁이 종결되었으므로, 종전은 매소성 전투 승리의 산물이 아니며 국제적 상황이 낳은 의도치 않은 결과였다는 것이다. 배근흥은 나당전쟁 연구상의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다양한 중국 측 자료의 소개와 정리로 나당전쟁 연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배근흥은 675년의 [[매소성 전투]]는 그 전투기록이 불완전한 점에서 볼 때 신라가 승리한 전투가 아니며, 이때는 당의 서북 변경이 위험해졌기 때문에 매소성 전투는 당군이 철수하면서 발생한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또한 676년 설인귀는 상주(象州)로 유배중이었기 때문에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으므로, [[기벌포 해전]]도 국내 학계의 입장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즉 나당전쟁에 관한 연구의 중점은 매소성 전투나 기벌포 전투가 아니라 그 이전의 상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배근흥은 나당전쟁 연구상의 문제점을 다시 언급하면서, 나당전쟁의 결과는 신라가 다시 당에 신속(臣屬)하여 나당 간의 군신 관계가 성립되었기 때문에, 나당 모두의 승리로 보아야 한다는 당라 종번(唐羅 宗蕃)론을 내세우기도 했다. 노태돈은 삼국통일전쟁을 다루면서 나당전쟁에 대해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소위 '한반도 방기론'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즉 나당전쟁은 669년 4월경에 시작되었으며, 670년 3월에 신라군이 요동에 진출하므로 토번은 나당전쟁의 개전과 구체적인 관계가 없음을 지적하고, 나당전쟁의 개전은 별다른 제3의 변수가 없는 가운데, 일차적으로 [[신라]]의 정세 판단과 전쟁의지에 따라 진행된 것으로 보았다. 한편, 최근에는 국외 학계에서도 나당전쟁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으며, 기존의 시각과는 다른 객관적인 논의도 진행되고 있는 점은 고무적이다. 이렇듯 나당전쟁에 관한 연구는 적지 않게 축적되어 왔다. 한중일 3국의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여러 문제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하였고, 이에 나당전쟁에 대한 이해도 풍부해졌다. 그러나 나당전쟁에 관한 연구는 아직 미흡한 부분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당전쟁에 관한 연구는 크게 둘로 나눠 볼 수 있다. * 토번의 발호로 인해 나당전쟁이 시작되고 종결되었다고 보는 견해 * 외부적 상황에 대한 검토없이 신라의 승리를 강조하는 견해 이러한 연구들의 입장 차이는 각국의 이해관계 혹은 연구자들의 성향에 따라 접근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대부분의 연구들이 나당전쟁의 개시, 종결의 국제 관계와 민족주의 측면적 의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이상훈]]은 '전쟁 자체'에 대한 연구는 미흡하다고 지적하였다. 670년대 토번의 발호로 인해 당의 군사전략의 중심이 동북에서 서북으로 옮겨갔으며, 이에 따라 676년 이후 한반도에서 더 이상 당과의 교전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당전쟁을 한반도에 국한시켜 신라의 승리만을 강조하는 견해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편 나당 간의 '전쟁 자체' 에 대해 아무런 고려없이, 단순히 당군의 이동 유무에 따라 전쟁이 시작되고 종결되었다는 견해도 수긍하기 어려운 관점이다. 국제 관계의 측면을 중시하다보면 전쟁의 동인과 추이에 대해 외부적 요인에만 치중하는 이해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노태돈, 《삼국통일전쟁》, p.3~4) 따라서, 나당전쟁의 연구는 토번의 발호라는 외부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나당전쟁 자체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접근해야 좀 더 진전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상훈, 《나당전쟁연구》). 실제로 과거 학계에서 연구하였던 나당전쟁은 바라보는 시각을 한반도에 국한하였으며 학계의 시각은 자주적인 승리를 강조하는 민족주의 성향이 짙었다. 이는 세계사 속의 흐름을 바라보며 이해하는 근래의 역사관에선 한계가 명백하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한계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이 바로 세계사의 흐름을 통해 보는 배경 이해가 두각되는 까닭이다. 과거 나당전쟁 관련 교육은 당의 행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토번 제국의 행보에 대한 접근과 이해가 전무했다. 그러나 실제로 당 제국이 토번과 기나긴 세월을 두고 대립하면서 군사 전략안들을 서쪽 토번을 향해 크게 집중한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토번은 당 태종에게 당의 황녀를 왕비로 맞이하고자 사자를 보냈지만, 토번이 당나라의 속국인 토욕혼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그러자 송첸감포는 대군을 일으켜서 토욕혼을 정벌하였고, 겸사겸사 백란 등의 강족의 마을도 공략한 후, 송주(현 쓰촨성 쑹판현)를 내놓으라고 당나라에 요구했지만 토번의 준동에 격노한 당 제국에게 격돌하는등 군사적 갈등이 번번하였다.[* 당 제국이 이겼다는 증거도 존재하지만 토번군의 사상자 1,000명, 당군 사상자 20,000명이라는 기록이 있는 등 명확하지 않다. 확실한 건 당 제국이 토번의 강성함을 실감하였다는 것.] 이후 당 황실에서는 문성공주를 평화사절로 시집보내기도 했지만, 당제국과 토번은 이후로도 기나긴 기간 동안 화친과 전쟁을 계속 반복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상훈 측이 주장하는 토번의 발호라는 외부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나당 간의 전쟁 자체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접근해야 좀 더 진전을 보일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강화시키는 근거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