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당전쟁 (문단 편집) ==== 정치·외교적 요인 ==== 시간을 앞으로 돌려,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 백제 부흥군이 진압된 후 옛 백제 지역의 대부분은 신라보다는 당의 지배에 귀속되었다. 당은 우선 백제 전토를 5등분해 웅진(熊津)·마한(馬韓)· 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 도독부로 나누어 통치하려 했으며, 이 중 옛 백제의 수도권인 [[웅진도독부]]를 중심으로 이 지역의 지배권을 강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5도독부는 [[계림대도독부]]나 [[이북 5도]]처럼 명목상 설치한 것이지, 실질적으로 당나라 괴뢰가 통치하는 것은 웅진도독부뿐이었고, 나머지 덕안 등은 백제 잔존 세력이 존재하다가 일찍이 신라가 차지했다.] 그러나 정작 도착해보니, 당군은 옛 백제 지역의 대내외적 여건이 여전히 불안한 상황인 것을 보게 된다. 오랜 전란으로 기존 백제의 행정체계는 완전히 무너져내렸고, 인구는 이산하였으며,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신라나 왜와의 관계 등 주변 상황도 매우 유동적이었다. 그래서 당 조정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백제 지역을 대고구려전 수행을 위한 거점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구체적인 작업을 일임받은 사람은 663년 [[백강 전투]]에서의 백제부흥군 격파에서 자신의 안목을 보여준 [[유인궤]]였다. [[손인사]]와 [[유인원(당나라)|유인원]]이 귀국하고 난 뒤, 유인궤는 웅진에 머물며 전후 복구사업을 주관하였다. 그는 민생 안정을 위한 행정적 조처를 취하면서, 정치적으로는 백제 유민을 웅진도독부를 중심으로 결집하는 작업과, 웅진도독부의 관할 범위를 확정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후자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멸망한 옛 백제 부여씨 왕족을 전면에 내세워 백제 유민을 회유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전 왕조 왕족의 상징성을 이용해 백성을 회유하는 방식의 정책은 신라가 [[고안승]]을 우대한 것, [[고려]]가 [[경순왕]]을 우대한 것, [[일본 제국|일제]]가 조선 왕실을 우대한 것, [[맥아더]]가 일본 [[천황]]을 존속시킨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백제라는 나라는 실제로는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여씨 왕실이 겉보기로는 여전히 남아있는 형태가 되는 것이고, 당의 [[꼭두각시]]라고는 해도 백제인들의 [[자치 국가]] 비슷한 체제를 꽂아놨다보니 그렇다면 신라는 이 지역으로는 한 발자국도 더 들어올 수가 없게 되는 것이었다. 옛 백제 왕실을 당나라의 [[괴뢰 국가]]로 삼아 신라와 병립시켜 신라의 백제 침투를 방지하는 것이 유인궤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보다 앞서, 660년 당으로 끌려갔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이 663년 귀국하였다. 이때 신라의 왕은 2년 전에 죽은 [[태종 무열왕]]의 뒤를 이은 [[문무왕]]으로, 일전에 문무왕은 660년 백제 멸망 직후 부여융에게 침을 뱉은 적이 있었다. 이 당시 부여융의 역할은 백제 부흥군과 왜국이 내세웠던 다른 왕자 [[부여풍]]의 가치를 끌어내려, 부여풍을 중심으로 백제인들이 규합하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백제 유민을 회유하는 것이었다. 비록 폐태자였지만 정상적으로 의자왕이 사망했으면 왕위를 이었을 위치인 부여융이 동생인데다 태자 자리와 거리가 멀었던 부여풍보다는 정통성이 있었기 때문. 그리고 부여풍군을 [[백강 전투]]에서 깨뜨린 뒤에도 부여융은 당나라 입장에서 이용 가치가 남아있었다. 백제 태자였던 사람을 구 백제 영토 통치기관의 수장이 되면 백제 유민들이 마치 백제가 부활한 것으로 '착각'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부여풍이 이끄는 부흥군이 진압되고, 그가 고구려로 도망간 뒤에도 옛 백제 지역 통치의 '도구'로서 부여융의 가치는 여전했다. 부여융은 반당적인 백제 유민의 동향에 대응할 수 있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동맹국인 신라의 동향에 대한 고려에서도 쓸 만한 패였다. 부흥군을 진압하는 동안 신라는 구 백제 여러 지역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침투시켰고, 당나라는 이 점을 우려하였다. 당은 대신 부여융을 웅진도독부를 대표하는 인물처럼 내세워서, 문무왕과 회맹하게 했다. 신라 측 기록에 따르면, 주류성을 함락시킨 후 당의 대부 두상(杜爽)은 "백제를 평정한 후 서로 회맹하라." 는 [[고종(당)|당 고종]]의 칙명을 내세워 부여융과 회맹할 것을 신라에게 종용했다. 당연히 신라는 회맹의 의미를 파악하고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거부했지만, 임존성이 함락된 후 회맹하지 않은 것을 당 고종이 책망하자 별 수 없이 맹약을 맺게 되었다. 이에 따라 664년 2월, 신라 대표인 각간 [[김인문(신라)|김인문]]과 이찬 [[천존]](天存)이 당의 칙사 [[유인원]]과 더불어 웅진에서 부여융과 맹세했다.[* 이 시기에 유인원은 백제에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이에 대해 다른 사람, 이를테면 유인궤가 유인원으로 잘못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에 따라 당은 부흥군과의 전쟁 기간 중 확장된 신라의 세력을 통제하고, 차단하기 위해 백제 왕자인 부여융을 내세워 신라와 대등한 회맹을 맺게 하여, 공식적으로 신라와의 경계를 분명히 정하였다. 다른 하나는 부여융을 백제를 대표하는 존재로 내세워 백제 유민을 회유하는 작업에도 이용하였다. 하지만 이 회맹 당시 신라에서는 문무왕의 신하인 김인문과 천존이 나섰다. 이렇게 되자 문무왕은 부여융에 대해서는 물론, 회맹을 주재하였던 당나라 칙사보다도 상위인 형태로 남게 되었다. 이에 당나라는 문무왕의 기를 꺾기 위해 회맹을 다시 한 번 추진했고, 664년 문무왕이 명목상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으로 책봉되자, 부여융 역시 웅진도독으로 664년 10월에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665년 8월, 웅진의 취리산(就利山)에서 유인궤가 회맹문을 짓고, 유인원이 주재하는 부여융과 문무왕의 회맹이 이루어졌다. 이때 양자는 "땅을 구획하여 양측의 경계를 확정하고, 백성을 살게 하여 각각 산업을 영위하게 하는" 의식을 행했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간신히 멸망시켰던 원수 백제가 5년 만에 부활한 것이었다. 이 이후로, 웅진도독부는 자체적으로 곽무종(郭務悰) 등을 옛 동맹국 왜에 파견하는 등 자체의 위상을 확보하려고 애를 썼다.[* 당시 왜국은 [[백강 전투]]까지는 백제부흥군을 적극적으로 도왔지만 부흥군이 궤멸한 뒤로는 한반도 개입을 그만두고 방어용 성을 대거 축조하며, 신라에 사신단을 자주 보내는 등 태세를 수비로 전환한 상태였다.] 먼저 자신들의 위상을 세우고 부여융이 문무왕과 대등한 위상을 갖는 회맹을 갖게 함으로써, 신라의 정치적 영향력이 서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을 막아버렸다. 이 모든 그림을 뒤에서 조종한 유인궤는 복구사업을 진행하고 행정체계를 갖추면서 대 고구려전을 준비했다. 단기적으로는 큰 효과를 보기 힘들지만, 장기적으로는 웅진도독부 체제를 굳히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그런데 신라 입장에선 이런 행동이 좋을리가 없었다. 당나라의 압력에 못 이겨 취리산에서의 회맹 등에 참여했지만, 부여융과의 회맹은 당의 괴뢰정권화된 백제의 재건을 승인하는 의식이었기에 신라가 진심으로 따랐을 리가 없었다. 나중에 당과 전쟁을 시작한 이후, 문무왕이 설인귀에게 신라의 불만으로 '''가장''' 강조한 부분이 이 문제였다. 당나라의 손을 빌린 백제 재흥은 결과적으로 신라의 대백제전 성과를 모조리 앗아가는 일일 뿐 아니라, 신라의 안보를 더욱 심각하게 위협하는 일이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재흥 백제국의 본체는 세계 최강의 국가 당나라의 군사력'''이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위협이 신라의 턱밑까지 들어온 것이었다. 당장 660년 8월, 당군이 백제를 멸한 뒤에 신라까지 침공하려 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어 신라 조정이 긴급하게 대책 마련을 위한 논의를 한 적이 있었다. 물론 헛소문에 따른 한바탕의 소동으로 끝났지만, 강대한 무력을 인접하게 되면서 신라는 늘 이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만 했다. 웅진도독부가 왜와의 교섭을 시도한 사실도 신라가 몰랐을 리 없다. 이런 가운데 신라 조정은 자국의 위상과 당나라와의 관계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인식하게 되었던 것 같다. '웅진도독' 부여융과 '계림주대도독' 문무왕이 동격으로 당나라 장수의 주재 아래 회맹하였으니, 이는 당나라에게 신라도 백제와 같은 성격의 존재로 규정되고, 또 백제처럼 될 수 있음도 의미하는 일이었다. 간단히 정리해서, 나당전쟁의 원인은 크게 3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 [[648년]] 당태종과 김춘추 간에 맺은 영토분할약정을 당이 위반했다. 이 영토분할약정을 부정하는 견해도 있지만, 734년 당이 대동강 이남 지역의 영토권을 신라에게 승인한 점에서 볼 때, 당은 신라의 요구를 그 이전부터 인식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나당전쟁의 가장 기본적인 원인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 부여풍 등이 이끄는 백제 부흥군의 활동에 대해 신라는 적극적으로 진압에 나섰지만 그 대가는 거의 얻지 못했다. 신라가 주도적으로 작전을 이끌어 나간 것은, 그러한 움직임을 통해 백제 고토에 대한 자신들의 주도권을 키우려는 행동이었겠지만, 당군의 요청이나 지휘에 의하여 당을 돕는다는 인상을 면할 수 없었으며, 앞서 본 바와 같이 되려 부흥군이 진압된 뒤 신라는 백제 고토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한치도 더 늘릴 수 없었다. * 부여융과의 취리산 회맹 문제다. 취리산 회맹으로 당나라의 괴뢰 정권인 백제와 신라는 동등한 위치에 서버렸고, 신라의 입장에서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망한 백제가 다시 당에 의해 신라와 대등한 국가로 부상되었다는것은 엄청난 [[모순]]이었다. 물론 양자를 구분하여 백제는 당의 내번(內藩)이고, 신라는 외번(外藩)이라 할 수 있었지만, 신라는 당의 의지에 따라 '''외번에서 내번으로 강제 전환'''될 수도 있는 상황에 놓인 것이었다. 이러한 신라의 입장을 잘 대변하는 것이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이다. 이는 671년 설인귀가 보낸 서한에 대해 문무왕이 답신을 한 것으로 그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에 남아있다. 이 문서에서 신라가 불만으로 제기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 648년 합의된 영토분할 약정을 당이 위반함 - 이 부분은 약속한 당사자 당태종의 말을 직접화법으로 그대로 옮겨 문장 첫머리에 제시하고 있다. * 백제 평정은 신라의 공로가 절대적이었음 * 백제 평정 후 신라군도 함께 주둔하며 백제부흥군과 싸움 * 백제 주둔 당군에게 지속적으로 군수품을 제공함 * 웅진 도독 부여융과 회맹시킨 것은 부당한 처사임 * 고구려 평정도 신라의 공로가 컸음 * 고구려 평정 후 비열홀(현재의 [[강원도(북한)]] [[안변]])의 [[안동도호부]] 귀속은 부당함 여기에서 신라는 당이 영토분할 약정을 위반한 점, 백제·고구려 평정에 신라의 공이 컸다는 점, 부여융과의 취리산 회맹은 부당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신라는 <답설인귀서>를 보낸 직후 '''백제의 옛 수도 [[사비성]]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을 도독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문무왕의 답서가 백제의 고지를 완전히 접수하겠다는 것을 당에게 통보하는 성격의 편지임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중국, 《백제 부흥운동사》 일조각, 2003, p.331) 당은 신라와 협약을 맺었던 648년 당시에는 기미정책(羈靡政策)의 대상으로 고구려만을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650년대 이후 대외 팽창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전략으로 수정했다. (최현화, <7세기 중엽 당의 한반도 지배전략>, 《역사와 현실》 61, 2006) 당이 비록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과정에서 신라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지만, 신라와 외교관계를 맺은 이래로 당은 여전히 신라를 '연합' 이 아니라 '군대를 이용'했다는 관점을 유지했다. 결국 신라는 당의 지배체제 속에 포함됨으로서, 신라가 멸망시킨 나라들과 형식상으로는 별 차이도 없는 동등한 위치가 되고 말았다. 신라는 삼국통일과정에서 대단한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실익도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쌍방의 공동이익이 없는데 [[나당동맹]]이 유지될 리가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신라는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쫓아버리기 위한 전쟁이라는 적극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다. (박현숙, 앞의 논문, pp.242~243)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