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당전쟁 (문단 편집) ==== 사회·경제 분야의 준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munmuwang123.jpg|width=100%]]}}} || || {{{#000000 '''[[문무왕]](文武王)''' }}} || 문무왕 대에는 재위 기간 중에 다섯 차례나 되는 사면조치가 진행되었다. 대사면이 활발했던 이유는 기념비적인 사건을 축하하기 위한 조치일 뿐만 아니라, 그만큼 사면해야할 범법자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669년의 대사면에 관해서는 사면 대상과 내용이 명기되어 있다. 문무왕은 신하들에게 교서를 내리면서, 범죄자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까지 포괄하여 사면했다. '''참고로 이 교서는 한국 역사상 내용이 기록된 교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지난날 신라는 두 나라 사이에 끼어 북쪽에서 쳐들어오고 서쪽에서 침입하여 잠시도 편안할 때가 없었다. 병사들의 해골이 들판에 쌓였고 몸과 머리는 따로 떨어져 멀리 뒹굴었다. 선왕께서는 백성들의 참혹함을 불쌍히 여겨 천승(千乘)의 귀중한 신분도 잊으시고, 바다를 건너 조회하고 병사를 요청하셨다. 이는 본래 두 나라를 평정하여 영원히 전쟁을 없게 하고, 몇 대에 걸쳐 쌓인 깊은 원한을 갚고, 백성들의 남은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심이었다. > >선왕께서 비록 백제를 평정하였으나 고구려는 미처 멸망시키지 못하였는데, 과인이 평정을 이루는 유업을 이어받아 마침내 선왕의 뜻을 이루게 되었다. 지금 두 적국은 이미 평정되어 사방이 안정되고 편안해졌다. 전장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모두 상을 주었고, 싸우다 죽은 영혼들에게는 명복을 빌 재물을 추증하였다. 다만 옥에 갇혀있는 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울어주는 은혜를 받지 못하였고, 칼을 쓰고 쇠사슬에 묶여 고생하며 아직 새로이 시작할 은택을 입지 못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생각하면 먹고 자는 것이 편안하지 못하니, 나라 안의 죄수들을 사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 >총장(總章) 2년(서기 669) 2월 21일 새벽 이전에 5역(五逆)의 죄를 범하여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의 이하로써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은 죄의 크고 작음을 따지지 않고 모두 석방하고, 이전에 사면을 받은 이후에 또 죄를 범하여 벼슬을 빼앗긴 사람도 모두 그 전과 같게 하라. 도적질한 자는 다만 그 몸을 풀어주되, 훔친 물건을 돌려줄 재물이 없는 자에게는 징수의 기한을 두지 말라. 백성들 중 가난하여 다른 사람에게 곡식을 빌려 쓴 사람으로서 흉년이 든 지방에 사는 이들은 이자와 원금을 반드시 갚지 않아도 되게 하고, 풍년이 든 지방에 사는 이들은 곡식이 익을 때에 단지 빌린 만큼만 갚고 그 이자는 갚지 않아도 되도록 하리라. 이달 30일을 기한으로 하여 담당 관청에서는 받들어 행하라.”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96&cid=49625&categoryId=49798|《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5역의 큰 죄를 범한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범죄자와, 손해배상을 해야할 자들을 모두 사면하였으며, 백성 가운데 부유층에 곡식을 빌어 그 이자 부담 때문에 [[노비]]로 전락할 운명에 처한 사람들을 모두 구제하였다. 이 같은 사면은 신라 사회의 경제적 피폐화에 따른 민간 신분층의 붕괴를 막기 위한 조치로 파악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 중에서는 삼국통일전쟁 과정에서 신라의 포로가 되었을 고구려 장정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며, 장기간의 전쟁으로 생활고에 시달려 범죄를 저지른 신라 장정들도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상훈, 《나당전쟁연구》pp.77) 고대의 전쟁에서는 적보다 더 많은 병력을 확보하고, 효율적인 동원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무열·문무왕 어간에 군사 총동원체제를 운영하면서, 군사 참여층은 중앙과 지방을 포함한 전국의 민으로 확대되었는데, 훈련된 적군의 포로나 사면된 장정들이 있다면 이들을 활용하여 새로운 병력자원으로 충당하였을 가능성도 상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여름 5월에는 천정(泉井), 비열홀(比列忽), 각련(各連) 세 군의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하는 등 문무왕은 나름대로 전쟁에 지친 백성들을 위로하려고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