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레쑤언 (문단 편집) === 피싸눌록의 왕자 === 조국으로 돌아온 나레쑤언은 아버지 마하 탐마랏차에 의해 피싸눌록의 우파라자(황태자)에 임명되었다. 그는 랑상의 수도 비엔티안을 정복하려는 버인나옹의 원정에 아버지와 함께 동참했지만 도중에 천연두에 걸리는 바람에 피싸눌록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부모님을 방문했을 때 아유타야에 찬카셈 궁전을 지었다. 그러던 1581년, 버인나옹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난다 바이인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1583년, 난다의 삼촌인 아바의 타도 민소와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바이닌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플모, 타웅구, 치앙마이, 비엔티안, 아유타야의 왕족들을 불렀다. 1584년 2월 2일, 나레쑤언은 명령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버고로 향하여 4월에 버마-아유타야 국경에 도착했다. 라마 4세의 57번째 아들이자 형인 [[라마 5세]]를 보좌하며 교육 장관, 내무 장관 등 요직을 지내며 태국 근대교육제도의 기반을 닦은 담룽 라자누바브(1862~1943)가 저술한 <버마와의 격전>에 따르면, 이때 난다 바이인이 아들 마하 우파라자 밍기이에게 수도에 남아서 나레쑤언을 맞이했다가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그러나 버마 측의 연대기들에 따르면, 난다는 1584년 3월 25일 아바의 반역자들을 토벌하러 가기 전에 나레쑤언을 맞이해 후하게 대접하려 했다고 한다. 담룽의 저술에 따르면, 나레쑤언은 국경도시 크렝에 도착했을 때 마하 우파라자가 자신을 공격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나레쑤언은 즉시 회의를 소집하고 신료들 앞에서 금잔에 물을 가득 담고 땅에 뿌린 후 이날부터 버마와의 모든 관계를 끊고 독립할 것임을 선포했다. 담룽의 저술에 따르면, 나레쑤언은 이후로 버고로 진군해 그곳에 포로로 잡혀 있던 가족들을 석방할 작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난다 바이인은 이미 아바의 반역자들을 섬멸하고 그의 수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에 나레쑤언은 약 1만 명의 가족들을 해방시킨 후 퇴각했다. 이에 마하 우파라자가 이끄는 군대가 그들을 추격해 사퉁강에서 따라잡았다. 그러나 버마군 장수 수라캄마가 나레쑤언이 화승총으로 쏜 탄환에 맞아 죽자, 마하 우파라자의 군대는 공황에 휩싸여 수도로 패주했다고 한다. 이후 나레쑤언은 푸에시의 성지에서 물을 마시며 옛 수코타이 주민들에게 충성서약을 받는 의식을 벌인 후 사완할록으로 진군했으며 버마군의 공격에 대비해 북부 지방의 모든 사람들을 아유타야의 수도인 시암으로 데려왔다. 한편, 나레쑤언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급보를 접한 난다 바이인은 두 개의 군대를 파견했다. 하나는 자신의 삼촌 밑에 있었던 파테인의 대리인이 이끄는 군대였고, 다른 하나는 난다의 동생 노라트라 망고시리가 지휘하는 치앙마이의 군대였다. 그러나 두 군대가 연합하기 전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나레쑤언에게 각개 격파당하고 본국으로 후퇴했다. 그 후 1586년, 나레쑤언은 파 모크와 방 카에오 인근에서 치앙마이의 비케로이를 격파하고 반 사켓에서 적병 1만 명과 코끼리 120마리, 말 100여 마리, 배 400척, 무기, 탄약, 식량을 포획했다. 1586년 10월, 난다 바이인이 친히 버마 군대를 이끌고 아유타야 침공을 개시했다. 그는 5개월 동안 아유타야를 포위했지만 나레쑤언이 철통같이 방어하다가 기회만 되면 역습을 가해와 손실이 막대하자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 담룽의 저술에 따르면, 나레쑤언은 이 시기에 버마군 요새에 야습을 개시했다가 버마군의 반격으로 아유타야군이 수세에 몰리게 되자 본인이 직접 요새 공격에 나서기로 하고 말에서 내려 입으로 검을 물고 스스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고 한다. 아유타야군은 왕자의 이 같은 모습에 사기가 크게 올라가 다시 맹렬한 공격을 했지만, 버마군이 수적인 우세로 반격해오자 결국 철수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버마 왕 난다 바이인은 나레쑤언의 용맹에 감탄하며 그가 무서운 적수가 될 거라고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 일화의 신빙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1590년, 마하 타마라카티라트 국왕이 사망했다. 그리고 1590년 7월, 나레쑤언은 모두의 추대를 받고 아유타야의 왕위를 차지했다. 이해에 버마 군대가 또다시 침공했지만 나레쑤언은 이를 물리쳐 많은 포로와 코끼리, 전투 물자들을 노획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