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루토/비판 (문단 편집) ==== 주제 전달의 실패 ==== 나루토는 대립하는 인물들을 설득하고 포용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서로를 이해함으로써 세상에 만연한 증오의 연쇄를 끊고 평화를 이룩하자"는 메시지를 전달해왔다. 이러한 심오한 주제의식의 도입은, '나이 먹고 보면 유치하다'라는 소년만화의 한계를 어느 정도 벗어났다는 점에서 좋은 시도였으며, 단지 이 주제의식만으로 나루토의 작품성을 [[원나블]] 중 으뜸으로 꼽는 독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주제에 대한 정답을 제시해야 하는 후반부에 가서도 명확한 정답을 제시하지 못했고, 결국 결말에서조차 주제를 대충 묻어버리고 끝내고야 말았다. 우선 후반부에서 이를 보여주는 '''설득 과정'''이 매우 허술하다. [[페인(나루토)|페인]]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어릴 적 은인이자 스승인 지라이야마저 살해하고 비정한 계획을 실행할 줄 알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날 처음 만나 겨우 한 번 싸워본 나루토가 대단한 근거도 없이 '''"날 믿어보라"'''며 설득하자 너무나도 쉽게 자신의 신념을 버려버린다. 나루토가 지라이야의 제자임을 감안하더라도 너무나 빠른 태도 변화였다.[* 여기서 작가의 편의주의적 밑밥이 깔리는데, 이미 가아라 구출 편에서부터 카카시가 나루토를 설명하면서 '나루토에게는 신비한 힘이 있어요. 그 어떤 사람과도 처음 만나자마자 아무 말도 안 섞고도 곧장 친구가 될 수 있죠.' 라며 작가는 은근슬쩍 나루토를 점점 비범한 인물로 만든다.]이와 비슷한 패턴은 [[우치하 오비토|오비토]]의 개심 과정에서 또 한 번 반복되어 혹평이 거세졌다. 심지어 오비토는 나가토를 두고 감화되기 쉬운 사람이었다며 디스했던 적이 있는데 자기가 반복했다. 오비토는 아카츠키의 흑막으로서 '''페인 이상'''으로 긴 세월 동안 치밀한 계획을 전개했으며 그 과정에서 '''스승과 그의 아내, 동료들'''마저 살해하고 8미와 9미를 내놓으라는 요구를 거절하자 전쟁을 벌일 정도로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상 만나고 싸운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나루토가 [[트라우마]]를 건드리자 순식간에 무너지고 순순히 주인공을 인정해버렸다. 또한 [[쿠라마(나루토)|구미]]가 나루토에게 이 세상의 증오를 어떻게 해결할 셈이냐고 질문할 때도 역시나 별다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그냥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대답을 했을 뿐인데 구미는 납득해버린다. 이렇게 구체적인 해결책이나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자신을 믿으라는 말만 되풀이하는데도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감동해주는 동일 패턴이 계속 이어진다. 작품 전반에 걸친 '''증오의 연쇄'''를 가장 집약적으로 상징하던 마다라는 주제를 소화하기도 전에 어처구니 없는 방식으로 퇴장하고 상징성이 빈약한 카구야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로 인해 오랜 역사에 걸쳐 인간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갈등이 순식간에 아무 맥락 없이 등장한 [[오오츠츠키 카구야|거대한]] [[제츠(나루토)|악]]에 의해 조장된 음모로 변질되어 주제의식이 실종된다. 이것마저 애니판에서 '''카구야에게 전쟁의 피해자이자 그것으로 인해 무한 츠쿠요미를 사용했다는 구실을 달아주면서 미화되고 더 답이 없어졌다.''' 결국 나루토의 주요 흑막 악당들은 그냥 '''모두 사실은 불쌍하고 좋은 애들이야!'''를 단체로 찍는 괴이한 현상이 펼쳐졌다. 2부 시작 이후 거론되던 최종 보스 후보는 [[페인(나루토)|페인]], [[토비(나루토)|토비]], [[야쿠시 카부토|카부토]]에 [[우치하 마다라|마다라]]까지 있었지만 그 중 마다라를 '''제외한 전원이''' 이런 식의 설득→감화 패턴대로 주인공 측으로 넘어가고 마다라처럼 설득하기 힘든 유형의 캐릭터는 [[오오츠츠키 카구야|데우스 엑스 마키나]]식으로 졸속 처리해버리는 바람에[* 마다라 또한 최후가 임박해서는 하시라마의 말에 감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나루토가 설파하는 주제를 따라가기는 커녕 오히려 반감을 가지는 독자들이 늘었다. 또한 작중에서 증오의 연쇄를 극단적으로 끝내려는 계획인 [[달의 눈 계획]]에 대해서 나루토는 제대로 된 반박을 전혀 하지 못했다. 굳이 반박 하나를 꼽자면, "그런 건 환상일 뿐이야! 언제나 꿈 속에서 살 수는 없어!" 정도에서 그쳤을 뿐. 이러한 감정론은 분명 직선적으로 독자들에게 전달되고 소년만화라는 점을 생각할 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악역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조목조목 주장해온 '달의 눈 계획'에 대한 정면 비판으로는 '''너무''' 부족했다.[* 마다라의 계획의 정당성에 대해 국내 독자들이 '''[[http://bbs.ruliweb.com/family/212/board/300067/read/22667599|이런]] [[http://bbs.ruliweb.com/hobby/board/300067/read/23266893|반박]]'''을 하기도 했다.] 나루토는 상대의 가치관과 계획에 대해서 '그건 틀렸다고, 증오의 연쇄를 내가 끊어보겠다'고 역설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 계획이 어디가 어떻게 틀린 건지, 어떻게 해야 진정한 평화를 만들 수 있는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냥 "네 말은 틀렸어! 내가 옳으니까 날 믿어!"라는 공허한 외침만 반복하다가 그걸로 안되자 논리적인 반박대신 "너도 호카게가 되고싶었잖아" 같이 감성에 호소할 뿐이다. 이런 치명적인 작중의 병폐가 얼렁뚱땅 계속되면서, 주인공인 나루토가 주제의식과 관련된 가치관을 결국 확립하지 못했고, 적들을 회유하는 과정에서 억지스러운 전개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독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완성도있는 결론을 보여주지 못했다. 또한 작가가 이런 '사랑-증오'의 대비 구도에 너무 집착한 탓인지, 나루토가 만나는 악역마다 상대의 증오를 모두 포용하고, 그가 흉악한 범죄자든 부모의 원수든 상관없이 아무 조건없이 용서하며 마치 성인군자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납득이 어렵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우치하 오비토|자신의 부모를 살해한 원수]]'''까지 웃으며 용서해주는 나루토의 모습은 분명히 종교적으로 보면 위대하고 거룩할 수는 있지만 정작 책을 읽는 독자들은 그런 나루토의 심리에 공감하지 못할 뿐더러, 그런 설득력 없는 감화에 연거푸 넘어가는 악역들이 당황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소년만화의 특성상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주인공'은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후반부의 나루토는 독자들의 이해를 까마득히 넘어선 성자(聖者)가 되어버린 탓에 '아무리 사랑이 중요하다지만 이건 너무 극단적인 거 아니냐'는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사랑과 관용'을 상징하는 나루토의 경우 사실상 이미 페인과의 전투에서 내적 성장이 완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숙한 [[대인배]]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페인전이 끝난 후에도 나루토가 싸우고 개심시켜야 할 상대가 잔뜩 있었다는 것이 이러한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페인, 토비, 마다라, 사스케 등 '닌자세계의 어둠'을 상징하는 캐릭터들은 너무 많은데 비해 '사랑과 용서'라는 상징성은 나루토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었고, 하시라마, 이루카, 지라이야, 킬러 비 등 '사랑'을 보여주는 캐릭터들은 많았지만 하시라마는 이미 고인이고 [[우미노 이루카|이루카]]는 후반부 비중이 제로, 지라이야는 나루토 사상의 근간이 되기는 했어도 자기 자신이 원수를 용서하는 등의 '행동하는 장면'은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오로치마루의 건을 계기로 한때의 제자인 나가토나 동료인 츠나데라도 나뭇잎의 해가 되면 죽이려 하는 강경파로 변했다. 킬러 비도 닌자대전 종반부에는 그냥 공기가 되어버렸으니..., 거기다 1부에서 나루토와 같은 사랑을 깨달았던 조연들도 함께 공기가 되어 결과적으로 나루토를 무한한 사랑과 용서의 '''도를 넘은 성인군자'''로 만들 수밖에 없았다. 증오의 연쇄와 복수를 상징하는 사스케의 경우는 이 정반대의 케이스로 간단히 말해서 '''사스케 말고도 증오의 연쇄를 상징할 수 있는 캐릭터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사스케가 가지는 상징성이 흐려졌다. 여기에 사스케의 심리묘사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호카게가 되겠다, 5카게를 처형하겠다 등 극단적인 언행을 하는 것을 독자들이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나루토와는 반대되는 의미로 공감할 수 없는 캐릭터가 되고 말았다. 더블 주인공 구도의 한 축이 상징성 과잉으로 독자들의 이해를 초월해버렸고 다른 한 축은 부족한 상징성에 비해 행적은 너무나 극단적이어서 독자들이 이해를 포기해버렸다. 작품의 핵심 구도나 다름없던 양 캐릭터가 모두 공감을 받지 못하니 당연히 작품이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도 불안해지고 만 것. 사실 나루토가 성자라는 말도 비꼬는 의미에 가까워져 버렸다. 본래 진정으로 정의를 추구하는 자는 사람에게 개심할 기회를 줄지언정 죄악에 관용을 베풀지는 않는다. 어제의 죄악을 용서하는 것은 곧 내일의 범죄를 용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후반에 나루토는 작중 악랄한 짓을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않는 이들을 일방적으로 피해자가 용서해야 한다는 사상에 경도되어 버린다. 자신을 왕따시켜 놓고 영웅이 되자 졸렬하게 싸인이나 받으려 드는 나뭇잎 마을 사람들이 왕따에 대한 일말의 고민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용서해버린다. 이처럼 반성 없는 나뭇잎마을 사람들이 또 다른 아이를 따돌린다 해도 이상하지 않으며, 실제로 왕따가 발생한다 해도 호카게인 나루토에게 적절한 대응은 기대할 수 없다. 3대호카게의 불의 의지를 이어받은 나루토는 3대가 그랬던 것처럼 마을 사람 모두가 내 가족이니 뭐니 하고 입을 털면서 사실상 학대와 왕따를 방관할 것이다. 그리고 피해자 아이에게 자신이 그들을 용서했던 것처럼 똑같이 용서하라고 할 것이다. 어른이 된 나루토는 어릴 적 스스로도 고통받았던 닌자세계의 어둠 중 일부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상대를 이해와 사랑으로 감싸는 성인군자의 모습이 부각되던 나루토가 치명적인 윤리적 오점을 지닌 이타치와 오비토를 단순히 닌자 세계의 피해자 및 가해자로서 포용하는 것이 아닌 그냥 '''미화'''를 해버리면서 나루토의 가치관이 과연 선한 것인지조차 의심이 가는 상황에 이르렀고 네지의 죽음조차 어장짱한 전개로 넘어가는 장면에서는 이미 내가 포기하는 것을 포기하라던 페인전에서의 나루토와 동일인물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마다라와 카구야의 해결책에 이르러서는 나루토가 가지고 있던 이해와 포용의 단면은 찾아볼 수조차 없으며 육도선인 앞에서 [[패드립|그 모친인 카구야를 자신의 모친 쿠시나와 비교하며 욕하는]] 나루토의 해맑은 얼굴은 [[충격과 공포다 그지 깽깽이들아|충격과 공포]]. 사스케의 경우 후반부에 이타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호카게들에게 닌자란 무엇인지 답을 구하여 닌자 세계를 지키겠다고 결심하고 호카게가 되겠다는 폭탄선언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사스케의 증오의 상징성이 희미해져 버렸다. 이 즈음부터 사스케가 싸우는 이유는 증오가 아니라 이타치가 지킨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결국 최후의 나루토와 사스케의 대결은 증오의 연쇄를 끊는 것에 대한 상징성이 매우 빈약해져 버렸으며 단순히 소년 두 명이 투닥거리다 우정을 회복하는 장면이 되어버렸다. 비록 나루토가 결말에서 사스케를 설득하기는 했으나 그 설득 과정도 논리적이기는 커녕 둘이 치명적인 부상을 입을 정도로 싸운 뒤 갑작스레 사스케가 사실은 어릴 적부터 나루토를 소중히 생각했었다는 뜬금없는 회상이 등장한다. 물론 1부의 사스케는 나루토를 소중한 친구로 생각했던 묘사가 많지만 방금 전까지만 했어도 나루토를 죽이려 했고, 2부 내내 그렇게나 막나가는 행보를 보여주던 사스케가 잃어버린 기억이라도 찾은 듯 갑자기 나루토에 대한 마음을 떠올리는 연출은 이와 대구를 이루는 1부 종말의 계곡 부분에 비해 상당히 억지스럽다.[* 애초에 사스케가 나루토를 죽이는 일에 집착한 것도 나루토를 쭉 가장 소중한 친구로 여겼기 때문이고, 697화에서 나루토의 숨통을 끊으려 하며 이걸로 겨우 혼자가 될 수 있다는 독백을 하는 것으로 보아 복선은 어느 정도 있었다. 하지만 내내 그 친구를 죽이려고 독기를 품던 녀석이 갑자기 저런 생각까지 들어있었냐 싶을 정도로 속마음을 쏟아내는 게 뜬금없다는 비판도 많으므로 이 부분 또한 판단은 독자의 몫.] 그래도 나루토와의 싸움 직후에 사스케의 독백을 통해 나루토가 자신에게 해준 것과도 같은 일[* 타인의 증오를 사랑으로 감싸안는 일, 즉 작품의 주제.]을 더 커다란 스케일로 해 나가는 것에 대해 일단 환기시키고는 있다. 안 그래도 상징성이 부족해져서 최종 전투가 단순히 나루토와 사스케 개인의 화해가 된 데다가 카구야가 등장하면서 작품의 주제가 희미해져 있으니 마지막에는 어떻게든 증오의 연쇄를 사랑과 이해로 종식시켜야 한다는 사상이 닌자 세계에 퍼지는 모습을 보여주든지, 혹은 그 외의 방법도 좋으니 어떻게든 작품의 주제가 제대로 표현되어야 할 것인데... 정작 마지막 화에서는 증오의 연쇄가 사스케가 말한 것과 같이 타인에 대한 이해로 희석되어가는 묘사는 전혀 없으며 대신 십여 년 뒤로 갑작스레 시간을 뛰어넘어 나뭇잎 닌자들의 2세들과 발전한 기술 문명을 보여준다. 가장 중요한 닌자세계의 구조적 및 문화적 측면에서 바뀐 점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비록 전쟁이 없다는 묘사와 5카게 회담의 묘사가 간략하게 등장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 제시가 전혀 되지 않았기에 진정한 평화로서 받아들여지기 위한 묘사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다. 상기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나루토가 타인의 증오를 해결해온 방법부터 주제 전달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비판을 받았다. 나루토는 일단 무력으로 상대를 압도해 놓고 이해와 설득을 통해 상대를 감화시키되, 이해할 수 없거나 감화되지 않는 상대는 그냥 그대로 무력을 통해 배제해 왔다. 나루토가 이해와 사랑으로 포용할 수 있었던 상대는 오비토나 페인, 가아라, 사스케와 같이 자신과 닮았거나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 한정되어 있다. 그렇지 않았던 [[사소리(나루토)|사소리]], [[카쿠즈]], [[우치하 마다라|마다라]], 카구야 등은 다른 이의 손에 제거되거나 나루토 스스로의 손에 의해 제거되었다. '''참고로 사소리는 엄연한 닌자 시스템의 피해자다.'''[* 닌자대전으로 인해 [[하타케 사쿠모]]에게 부모님을 잃어서 사소리에게 트라우마를 주었고 타락했고 인생이 어긋났다.] 이러한 나루토의 행보를 생각하면, 이 평화가 단순히 닌자 세계의 현존하는 투탑 최강자인 나루토 및 사스케가 평화주의자이기에 생겨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근데 사실 현실에서도 설득과 감화는 우발적인 폭력 상황이 발생했는데 다행히 아직 피해자를 해치진 않은 상태이거나 싸움이나 살생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경우에나 통한다. 정말로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상대는 말로 어찌 해보기 이전에 일단 제압을 할 수밖에 없으며 그런 위험분자를 제압해놓고 평상심으로 설득을 위한 주장을 펼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비범한 것이다. 감화되지 않는 상대를 배제했다고는 해도 솔직히 그거 말고는 달리 방법도 없지 않은가.] 결과적으로 나루토 세계관은 마지막까지 [[역사는 반복된다|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본질적으로는 바뀐 것이 없으며 증오의 연쇄는 끊어지지 못했다는 인상을 주게 한다.]] 나루토는 작품의 결말에서조차 주제의 완성에 실패했으며 이것은 작품의 완성도에 치명적인 결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 문제점은 후속작인 보루토에 들어서도 딱히 달라진게 없어서 전술했듯 무슨일이 생기면 토벌대를 보내서 토벌하기에 급급하며 닌자마을 중에서 나루토에게 반대하는 마을이 나오는등 끝내 증오의 연쇄를 청산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