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선정벌 (문단 편집) === 유럽: 러시아의 상황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800px-Russian_Tsardom_1500_to_1700.png|width=100%]]}}} || || 1500년, 1600년, 1700년의 러시아 영토. || 1500년대,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2백 년만에 독립하여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던 [[모스크바 대공국]]은 [[이반 4세]]의 치세에 이르러서는 부국강병 정책을 착실히 추진하며 주변의 다른 루스 국가들을 병합했고 마침내 군주의 명칭을 [[차르]]로 개칭할 정도로 성장했다. 이로써 광대한 러시아 평원의 많은 지역이 러시아의 손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러한 급격한 팽창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외교적 상황은 좋지 않았다. 자그마치 네 개나 되는 강대국들이 러시아의 유럽 방면 출구의 대부분을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쪽에서는 [[야기에우워 왕조|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이 강력한 기병군단을 바탕으로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이어지는 [[동유럽]] 평원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최전성기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남부 일대와 흑해 연안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후원을 받는 몽골-튀르크계 이슬람 국가인 [[크림 칸국]]이 툭하면 쳐들어와 노예사냥과 학살을 일삼았다. 서북쪽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핀란드]]에서는 [[덴마크]]가 주도하는 [[칼마르 연합]]에서 독립한 [[스웨덴]]이 착실히 힘을 다지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독일 북쪽 유틀란트 반도와 노르웨이의 [[덴마크-노르웨이 왕국]]도 강대한 해양력을 바탕으로 발트해의 입구와 도서지역을 틀어쥐고 그 위상을 떨치고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는 당시 유럽에서는 덩치만 큰 변방국으로 받아들여졌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8EA0F6D-D8CB-42EF-9C79-3E0C65E68629.png|width=100%]]}}} || || 검은 선 안이 1200년대의 [[리보니아]] 연맹. 현재의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지역에 해당한다. 청록색은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의 직할 영지, 그 외의 지역들은 주교령[* [[주교]]가 다스리는 [[가톨릭]] 교회의 세속 영지. [[교구]]들이 오늘날처럼 단순히 지역의 성당과 신자들만 관할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영주로써 아예 일대를 통치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주교령을 다스리는 주교를 특별히 [[주교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들이다. 오른쪽으로 러시아의 전신 중 하나인 [[노브고로드 공화국]]과 접한 모습이 보인다. 1500년대 중반에도 큰 변동은 없었지만, 위의 [[에스토니아 공국]] 지역을 덴마크에게서 넘겨받아 포함하고 있었다. || 비록 "뇌제" [[이반 4세]]가 국력을 신장시키기 위해 서유럽과의 무역을 크게 늘렸지만, 마땅한 항구가 없는 러시아의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그 무역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자 이반 4세는 유럽 세계로 나가는 좋은 출구를 얻기 위해 전쟁을 준비했고, 1558년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의 식민지였던 [[리보니아]] 지역으로 쳐들어갔다. 러시아가 유럽행 출구가 없었는가 하면 아니었다. 리보니아 전쟁 개전 시점에서 러시아는 북쪽 [[백해]]에 [[아르한겔스크]] 항구를 가지고 있었고 이반 4세의 치세에 와서는 [[핀란드만]]에 접한 [[이반고로드]] 항구도 추가로 건설했다. 하지만 두 항구 모두 그다지 좋은 항구는 아니었다. 아르한겔스크는 너무 북쪽에 있었던 데다 겨우내 얼어붙는 기간이 너무 길었고 이반고로드는 내륙으로 들어와 있어 수심이 너무 얕았다. 그 외 핀란드만에 접한 후에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될 [[잉그리아]]의 [[네바강]] 하구도 있었지만 당시 이 지역은 핀란드에 주둔한 스웨덴 군대의 위협을 받는 국경 지대의 미개발 늪지대였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리보니아의 중심 도시들이던 [[리가]][* 현 [[라트비아]]의 수도.]와 [[레발]][* 현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을 노리고 전쟁을 일으킨 것. 리가와 레발은 북방 십자군의 정복 활동으로 이주해온 [[독일인]]에 의해 수세기 전부터 개발되어 [[한자동맹]] 회원 자격을 보유하고 있었고 심지어 독일 본토의 왠만한 한자동맹 도시들에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항구와 산업 시설들을 가지고 있는 알짜배기 도시들이었다. [[파일:livonia_lopp.jpg|width=100%]] ▲ 16세기 리보니아 전쟁 전후 [[발트해]] 일대의 상황. 리보니아가 3분할 당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덴마크(황갈색)가 [[사레마]] 섬을, 폴란드-리투아니아(보라색)가 리보니아 대부분을, 스웨덴(녹색)이 [[에스토니아 공국]]과 [[잉그리아]][* 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연방시와 [[레닌그라드 주]] 일대]를 집어삼키고 러시아(분홍색)는 내륙으로 밀려나 있다. [[파일:Sw_BalticProv_en.png]] ▲ 나선정벌이 벌어지던 17세기 중반의 리보니아와 잉그리아. 러시아의 발트 해 출구가 여전히 [[스웨덴]]에 가로막혀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 1620년대의 폴란드-스웨덴 전쟁으로 폴란드령 리보니아 대부분이 스웨덴에 넘어갔다. 그리고 1645년 덴마크는 스웨덴과 브룀세브로 조약을 맺어 [[사레마 섬]]을 스웨덴에 양도하고 철수했다. 1558년에서 1583년까지 20년 넘게 벌어진 이 리보니아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리보니아 연맹을 해체시켜 버리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곧 러시아의 팽창을 경계한 [[스웨덴]], [[폴란드 왕국|폴란드]], 그리고 [[덴마크]]의 합동 공격을 받아 전세가 역전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오스만 제국]]의 사주를 받은 [[크림 칸국]] 군대가 남쪽에서 쳐들어와 [[모스크바]]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이때 모스크바 시민 수만 명이 크림 칸국에 노예로 잡혀갔다.] 귀족과 농민들의 반란까지 속출하자 러시아는 더 이상의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어졌다. 러시아는 패배했고 리보니아는 승전국들에게 덴마크령 [[사레마]], 스웨덴령 [[에스토니아 공국]], 폴란드령 [[리보니아]]와 [[쿠를란트-젬갈렌|쿠를란트-젬갈렌 공국]]으로 삼등분되어 갈라먹혔다. 특히 스웨덴은 위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예테보리]]를 제외한 스칸디나비아 남부와 서부의 주요 항구들을 덴마크가 장악하고 있어 러시아처럼 항구 확보에 목숨을 건 상황이었기에[* 스웨덴이 덴마크로부터 예테보리를 지키기 위해 들였던 노력은 러시아의 부동항 확보 노력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에스토니아의 [[탈린|레발]]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이반고로드]]마저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단, 이반고로드 일대의 잉그리아는 1595년 테우시나 조약으로 반환했다. 대신 스웨덴은 핀란드의 [[사보(핀란드)|사보]]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이로써 러시아는 완전히 패배한 걸로도 모자라 있던 항구마저 잃어버린 채 유럽 진출은 훗날을 기약해야만 했다. 거기다 [[표도르 1세]] 사후 벌어진 일종의 왕위계승 다툼인 [[혼란 시대]]에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지그문트 3세]]가 개입해 모스크바를 급습, 차르를 갈아치우고 이후로도 수십년 간 러시아를 위협하면서, 러시아는 더더욱 유럽 내로 진출할 수 없었다. 이렇게 서쪽으로의 팽창이 좌절되자 러시아는 동쪽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담비]] 가죽 같은 것들은 유럽 상류층의 사치품으로 고가에 거래되는 품목이었는데 러시아는 숲에서 잡은 많은 담비 가죽을 아르한겔스크를 통해 유럽에 수출하며 큰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담비는 야생동물이라 사냥당할수록 개체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가죽 수요를 맞추기 위해서는 동쪽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리보니아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인 1552년에 러시아는 동쪽의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을 먼저 병합함으로서 동방의 위협을 제거하고 [[볼가강]] 수운 체계를 장악해 놓은 상태였다. 이로써 러시아는 강한 적들이 버티고 서 있는 서쪽과 남쪽과는 달리 동쪽으로 마음놓고 진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튜멘 지역에 자리잡은 [[시비르 칸국]]이 우랄 산맥 서쪽에서 광산업을 하던 스트로가노프 가문[* 러시아의 대부호 가문. 요리 [[비프 스트로가노프]]를 만든 그 가문이다.]의 사업장을 약탈한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의 시베리아 확장은 더 가속화되었다. 열 받은 러시아는 예르마크가 이끄는 '''돈 카자크''' 부대를 고용해 [[시비르 칸국]]을 단숨에 밀어 버렸고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이후로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영토를 확장]]했다. 시베리아 확장은 [[스페인]]이 신대륙을 정복할 때 [[콩키스타도르]]들과 계약해 하청을 굴렸던 것과 비슷하게 시베리아를 개척할 원정대를 적당껏 모집한 후 원정대가 알아서 개척(겸 침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원정대로 나선 자들이 보통 용자들이 아닌지 정말 비상식적으로 빠르게 시베리아를 평정했다. 덕분에 이전까지는 러시아에게 막대한 위협이었던 시베리아와 스탭 유목민들은 그야말로 씨가 마르는 수준으로 박살닜다. 1598년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에 식민도시 [[톰스크]]를 세웠으며, [[17세기]]에는 [[바이칼호]] 부근까지 진출했다. 이후 1647년, 기어이 러시아는 북태평양 연안에 도달했으며, 이를 [[오호츠크 해]]라 이름붙였다. 이후 러시아는 [[예니세이 강]]에 세운 식민도시와 [[레나 강]] 중류의 [[야쿠츠크]]를 바탕으로 1638년 남진을 시작, [[아무르강]] 유역에 도달하기에 이른다. 당시 아무르강에 도달한 탐험대는 포야르코프 원정대로, 이후 하바로프[* 훗날 이 강변에 세워지는 도시 [[하바롭스크]]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원정대가 1649년, 1651년 두 차례에 걸쳐 강 근처 [[원주민]] 부락들을 공격하고 부락의 물품들을 노획하는데, 이때 주로 노획한 물품은 [[털]][[가죽]]이었다. 하바로프 원정대는 아무르강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남하해서 아예 대륙의 동쪽 끝까지 진출하고자 했다. 허나 아무르강 너머는 청나라의 권역이었고, 아무르강을 넘어서 대륙 끝까지 가겠다는 것은 곧 [[청나라]]를 침공하겠다는 소리가 된다. 하바로프 원정대는 청나라의 권역 내로 침입해 청나라의 보호 하에 있는 현지 부족들을 열심히 약탈하기 시작했다. 청나라의 본토이자 발원지이기도 한 [[만주]]는 북쪽 경계인 [[스타노보이 산맥]] 이남으로 별다른 자연방어선이 없었기 때문에 이곳에 침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특히 만주 북부에서 아무르강과 [[송화강]]을 따라 이동하는 수로는 말뿐만 아니라 배에도 익숙한 카자크들에게 있어서는 장애물이 아니라 [[고속도로]]나 다름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