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예(당나라) (문단 편집) == 생애 == 경조 운양(現 섬서성 [[셴양시]]의 일부) 출신으로 616년에 [[수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물자들을 모두 탁군에 쌓아놓고 임삭궁에는 진귀한 보배가 많아 도적들이 습격해 약탈했는데, 호분낭장으로 있던 나예가 혼자 나아가 싸워서 도적들을 격파한 일이 많아 위세와 명성이 높아졌다. 이 일로 인해 조십주 등이 그를 시기했고 나예는 공을 세운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 성 안의 창고는 쌓였지만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지 않는다면서 사람들을 자극했다. 나예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온 후 군의 승이 성을 나와 안부를 묻자 그를 잡아 성 안으로 들어간 후에 창고의 물품을 꺼내 병사들에게 내리고 곡식을 열어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어 사람들을 모두 복종시켰으며, 자신에게 동참하지 않는 발해태수 당의 등 몇 명을 죽이고 그 위세가 연 지역을 진동하고 유성, 회원 등에서 나예에게 귀부했다. 유성태수 양림보를 내치고 군을 영주로 고치면서 양평태수 등고를 총관으로 삼고 나예는 스스로 유주총관이라 했다. 618년에 [[우문화급]]이 수양제를 죽이고 사자를 파견해 부르자 나예는 수의 신하라면서 사신의 목을 벤 후에 양제를 위해 발상하고 사흘 간 곡을 했으며, [[두건덕]], [[고개도]] 등이 부르자 이를 거절하고 [[당고조|이연]]에게 투항할 뜻을 품고 618년에 장도원이 산동을 위로하고 다니자 어양, 상곡 등 여러 군과 함께 항복했다. 12월 13일에 조서를 받들어 유주총관이 되었고 [[설만균]], [[설만철]] 등이 용감하고 지략이 있어 그들을 가깝게 대했으며, 두건덕이 유주를 공격하자 싸우려고 했다가 설만균이 성 옆에 매복했다가 강을 반 쯤 건널 때 기다렸다가 공격하면 이길 수 있다고 하니 그 말을 받아들이면서 설만균을 보내 두건덕의 군사를 격파했다. 수의 통직알자를 지낸 온언박을 사마로 삼았고 나예는 연공에 봉해졌다가 619년 10월 4일에 [[사성정책|이(李)씨 성을 하사받고]] 연군왕에 책봉되었으며, 6일에 두건덕을 [[헝수이시|형수]]에서 격파했다. 622년에 [[당태종|이세민]]과 합류해 유흑달을 공격하는 싸움에 참가해서 천절장군이 되었고 623년에는 좌익위대장군이 되었는데, 이 때 조정에 들어가면서 공로를 믿고 교만해 [[당태종|이세민]] 좌우의 사람들이 군영을 찾아오면 아무런 연고없이 구타했다. 이로 인해 이연이 크게 노해 나예는 감옥에 갇혔다가 석방되었으며, 625년에 회정현, 탄쟁협에 주둔하면서 돌궐의 공격에 대비했다. 당태종이 즉위하자 편안하지 않았고 무당 [[이오계]]가 귀한 기색이 나타났다면서 반란을 권고하자 경주를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밀칙을 받든다고 하면서 군사를 이끌고 조정으로 들어온다고 해 빈주를 점거했다가 빈주 치중 조자호가 [[장손무기]]가 이끄는 관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통군 양급과 함께 자신을 도모하려는 것을 알아내 가뒀다. 양급이 성 밖에서 변고가 있는 것을 깨닫고 공격하자 나예의 무리가 무너졌으며, 나예는 처자를 버리고 돌궐로 달아나려고 했지만 오씨에 이르러서 좌우 사람들에게 살해당하고 그의 목은 장안으로 전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