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월환 (문단 편집) === 초년기 === 1912년 10월 14일 [[전라남도]] [[나주시|나주군]] 마산면 박포리(現 [[나주시]] 왕곡면 신포리 박포마을 152번지)에서 아버지 나종성(羅鍾成, 1874 ~ ?)[* 초명은 나정화(羅政和). 자는 정화(政化).]과 어머니 [[파평 윤씨]][* 윤효경(尹孝敬)의 딸이다.] 사이에서 4남 4녀 중 넷째 아들, 막내로 태어났다. 이후 9살 되던 1920년을 전후해 왕곡면 송죽리로 [[http://www.naju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13|이주했으며]], 나월환이 중국으로 건너간 뒤 1940년 가족들은 나주군 영산포읍 영산동(現 나주시 영산동) 150번지로 [[http://www.naju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22|이주해]] 본적을 두었다. 그의 집안은 부농이 아니었지만 20~30마지기를 경작하고 집 뒤에 대나무밭 12마지기를 소유해 그런대로 먹고 살만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말주변이 뛰어나 동네 애들과 소꿉장난을 할때마다 항상 앞에 나와서 일장 연설을 했다고 한다. 또한 일제에게 반감을 품고 강직한 성격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어릴 때부터 배일의식을 가슴에 품었다고 한다. 훗날 나월환이 자신의 절친한 동지였던 [[박기성(독립운동가)|박기성]](朴基成)에게 들려준 일화에 의하면, 한 번은 나월환이 아이들을 모아놓고 몰래 동네 창고에서 [[멍석]]을 가져와서 아이들을 멍석에 앉혀놓고 일장 연설을 한 뒤 멍석을 그대로 두고 친구들과 함께 다른 놀이를 하러 갔다고 한다. 이에 멍석 주인이 나종성에게 하소연하자, 나종성은 아들을 찾았다. 자신을 찾는다는 말을 들은 나월환은 아버지에게 얻어맞을 것을 두려워하다가 동네 길 모퉁이에서 아버지와 마주치자 줄행랑을 쳤다. 그러나 나월환은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고 아버지가 그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섰다. 이때 나월환은 문득 길에 널브러진 가느다란 나무막대를 집어들고는 길 앞에 줄을 그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유심히 지켜보는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이 선을 넘어오면 내 아들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엉뚱한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 한바탕 웃고는 그를 용서해줬다고 한다. 나월환은 5살 때부터 집 옆에 마련된 독서당에서 독학했고 1922년에 양산[[보통학교]]에 입학해 1928년에 졸업했다.[* [[인천광역시]]는 나월환이 1924년 3월 17일에 인천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며 인천의 인물로 선전하고 있으며, 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서도 인천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고 기록되었다. 하지만 인천 공립보통학교 졸업생 명부엔 나월환의 이름이 없고, 나월환이 1922년에 인천에 갔음을 입증할 정황 증거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나월환의 친인척들은 그가 양산보통학교를 졸업했다고 일관적으로 증언했다.] 그는 학교에 다니는 동안 [[일본인]] 학생들로부터 '센징'(鮮人)'이라는 놀림을 받으면서 나라를 잃은 민족의 한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에 그는 나라를 빼앗아간 일본의 정체를 알기 위해 일본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인천의 둘째 형 집에 머물렀다가 일본으로 갔다. 그가 일본에 언제 갔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1928~1929년 사이에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