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월환 (문단 편집) === 중국 === [[중국]]으로 건너온 나월환은 양여주, 김지강, 유서, 엄형순, 이용준, [[원심창]], 박기성, 이하유, 김광주 등 혈기왕성한 30여명의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1932년 5월 [[김구]]의 주선에 따라 다른 청년연맹들과 연대해 서간단(鋤奸團)을 결성하여 일제에 빌붙은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했다. 나월환은 또 한국혁명당에 가입해 1934년 한국혁명당이 해산될 때까지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1934년 2월, 나월환은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일특별반이 설립되자 즉시 입교했다. 그 후 1935년 음력 1월 15일에 헌병사령부 훈련소 견습으로서 [[소위]]에 임관했고, 그해 6월 중순에 조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던 1936년 늦은 봄, 나월환의 친형 나일환이 사업차 중국에 들러 동생을 찾아왔다. 며칠 후 나일환이 귀국길에 오르자, 나월환은 상하이 부두까지 나와 형을 배웅했다. 이때 일본 영사관 형사대가 그를 급습해 체포했다. 나월환은 일본 영사관으로 끌려가 며칠 동안 고문받았고 [[칭다오시|칭다오]]항으로 보내진 뒤 일본으로 압송될 위기에 몰렸다. 나월환은 탈출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배가 청도항을 떠나려 할 때 두 명의 호송경찰에게 술을 권해 방심케 한 뒤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말하고는 잠깐 혼자 있게 된 틈을 타 곧바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 후 청도항에 정박한 배들 사이로 숨어가며 구사일생으로 몸을 피한 그는 곧바로 청도시장을 찾아가 구원을 호소했고, 청도시장은 그를 [[난징]]으로 돌아갈 수 있게 배려했다. 난징에 돌아온 그는 탁월한 용기와 대담함을 갖췄다는 칭찬을 받았고 중앙육군군관학교 교수 배지를 달고 다닐 수 있는 특별대우를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