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월환 (문단 편집) === 한국청년전지공작대 === 1937년 초 중위로 진급한 나월환은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군]]에 배속되어 일본군과의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러던 1939년 10월, 나월환은 이하유, 김인, 김강, [[박기성(독립운동가)|박기성]] 등과 함께 중국 군대를 떠나 독자적으로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결성했다. 공작대 대장은 나월환이었고, 부대장은 김동수, 정치조장은 이하유, 군사조장은 박기성, 선전조장은 이해평, 대원으로는 조시제(趙時濟, [[조소앙]]의 장남), 맹조화(孟兆和), 평지성(平智盛), 김원영(金元英), [[현이평]], 송길정(宋吉潗), 하상기(何尙祺), 김작생(金作生), [[엄익근]], 김인(金仁, [[김구]]의 장남) 등이 참가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회보 <한국청년(韓國靑年)>을 발간했는데, 발간사에서는 전지공작대 결성의 의의와 임무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1. 중·한 양대 민족의 공동의 적은 일본제국주의이다. 일본제국주의가 타도되지 않는 한 중·한 양대 민족의 해방이 가망 없을 뿐만 아니라, 동아 내지는 세계의 진정한 평화도 기약할 수 없는 일이다. 중국 항일전쟁의 승리는 이것이 곧 한국독립, 한국민족 해방 승리의 개시인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들은 중국항전의 최후승리를 바랄 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다시 나아가서 우리들의 역량을 다하여 중국 항전의 승리를 촉성하여야 한다. 중국항일전쟁과 한국의 독립, 한국민족의 해방 운동이 일본제국주의의 타도에 있음은 그 의의에 있어서나, 행동에 있어서 이것을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분리하여서도 안 될 일이다. >2. 우리들의 역량을 배양 충실하고 공헌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최후 승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공작을 실천하는 중에 학습한다. 우리들의 혁명선열을 배워 알고, 혁명의 이론과 기술을 학습한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공작 실천 중에서 모든 약점과 곤란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적에게 부림을 당하고 노예가 되는 동포를 건져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들은 항일의 한국청년 동지들을 우리들의 진으로 모아야 한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먼저 중국군에게 보낼 솜조끼를 마련하는 데 필요한 4천여 원을 마련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1939년 10월 19,20일 저녁 7시 반에 [[연극]]을 두차례 공연했다. 공연의 제목은 <국경의 밤>, <삼강호(三江好)>, <재회> 등이었다. 이후 대원 16명은 태행산으로 가서 중국군 제27군을 도와 정보수집 등의 활동을 벌였고, 나머지 대원들은 연극 공연을 통해 중국 군민과의 친선을 도모했다. 1940년 5월 20일부터 10일간 시안 성안 남원문(南院門) 가설극장에서 거행된 <국경의 밤>, <한국의 한 용사>, <[[아리랑]]> 연극 공연은 중국 군관민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이때 나월환은 대회주임으로서 이 연극 공연을 주관했다. 또한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서안부녀회가 주관하는 모금운동에 동참하는 뜻으로 <아리랑> 공연의 수익금 수천원을 부녀회에 전달했다. 부녀회는 이 돈으로 하복을 반들어 전방의 중국군 병사들에게 전달했다. 중국인 기자 젠민(建民)은 <아리랑> 공연을 관람하고 <한국청년> 지에 '흥분된 마음으로 아리랑을 보고'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연극에 출연한 한국청년 동지들은 곧 전장으로 가서 적과 전투를 벌이게 될 용사들이다. 그들은 자신을 희생할 각오를 하고, [[충칭]]에서 [[시안]]으로 왔다. 피 흘리는 전투를 통해 자유해방의 큰길을 개척하려는 투사들이다. (중략) 잠에서 깨어난 사자의 포효처럼 돌연 징소리가 울려 퍼지자, 공연장의 분위기는 일순 긴장되어 관중석의 잡음이 순식간에 수그러들었다. "저희는 정식 연기자가 아닙니다.", "저희는 장차 전방으로 떠날 전투원입니다. 이번 위문공연을 통해 전방에 있는 병사들에게 조금이나마 존경과 열정을 표하고자 합니다. (중략) 여러분의 열렬한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라도 많은 외적을 무찌르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라는 감사의 말을 전하며 보고를 마쳤다. 이후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시안을 근거지로 삼고 동관(潼關)을 경유, [[낙양]], 자오쭤(焦作), 원청(運城), 린펀(臨汾), 태원, 석가장, [[베이징]]을 연결하는 중국군 전구 일선 공작에 투입되어, 일본군 점령지역에 침투해 100여 명이 넘는 한인들을 모집하는 등 여러 전공을 세웠다. 또한 룽하이선 지구, 화북성과 [[산서성]] 남부 지역으로 대원을 파견해 중국군의 항일 전투에 직접 참여했으며, 일본군 포로들을 상대로 [[통역]] 및 회유 임무를 맡았고, 우리 말 방송과 우리 글 선전문건 등을 이용해 일본군 점령지구에 있는 한인들을 선동해 일본군을 상대로 봉기하거나 중국군에 가담하도록 유도했다. 이들의 활동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40년 5월경부터 일본군 점령지역 내에 거주하는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초모공작을 전개하였는데, 김동수·이해평·김천성·[[박영진(독립운동가)|박영진]]·김용주·이월봉·이삼녀 대원은 34집단군 태항산유격대 정훈부에 배속되어, 태항산 링추안(陵川)을 거점으로, 일본군 36사단 주둔지역인 루안현에 거주하는 6천여 한인사회와, 도청선(瀋陽-焦作) 연변지역인 신샹(新鄕)·쟈오쭈어(焦作)·쇼우(修武) 등지를 무대로 초모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김천성은 일본군 여단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루안성 내에 잠입하여 [[문응국]]·이병곤·박춘섭·정일명·김형철 등을 초모하고, 다시 일제 여단사령부에서 통역으로 근무하는 이도순·[[고여순]] 등 40여 명을 포섭하여, 일부는 현지에서 공작 업무에 종사토록 하고, 일부는 시안으로 후송하여, 후종난군 전시간부훈련단에서 훈련을 받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이도순·박춘섭 등은 중국[[유격대]]와 함께 루안성 습격을 계획하기도 했다. 또 김용주·박영진 등은 [[허난성]] 쟈오쭈어에 잠입하여, 최봉진·송철 등 10여 명을 포섭하고, 김천성 등은 다시 스쟈좡을 거쳐 베이징·[[톈진]] 방면으로 진출하여, 조직과 활동을 확대하였다. 그 결과 전지공작대의 활동범위가 시안에서 퉁관을 경유하여 뤄양·장즈·쟈오쭈어·윈청·린펀·타이위앤·스쟈좡·베이징 등지를 연결하는 산시성 및 허난성, 그리고 화북지역 일원의 광범위한 지역을 포괄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나월환은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장으로서 훈련생들을 잘 통솔했다. 그는 일본군 점령지역 내에 거주하다가 새로 합류한 한인 청년들을 시안으로 후송해 한국청년훈련반(일명 한청반)에 수용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 청년들은 3개월간 훈련을 받은 뒤 중국군 소위로 임관되는 동시에 전지공작대 대원으로 편입되었다. 한청반은 2개 구대로 편성되었고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나월환이 대장으로서 운영을 총괄했고, 부대장 겸 제1구대장 김독수, 제2구대장 박기성, 정치지도원 이하유, 군사지도원 조시원(趙時元), 조손한(趙擎韓), 송호성(宋虎聲) 등이 전술, 역사, 정신교육 등을 담당했는데, 군사교육과 정신교육이 '3:7'의 비율이었다고 한다. <한국청년>에 기재된 '우리의 하루'에 따르면, 훈련반에 들어온 훈련생들의 삶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먼저, 두 번의 호루라기 소리에 기상하여 마당에 모여 [[애국가]]를 불렀다. 그런 다음 xxx [[공원]]으로 가서 달리기, [[독서]] 또는 한담을 나누다가 부대로 돌아와 교육을 받았다. 또한 신임대원들은 '하나, 둘' 구령에 맞춰 기본 동작을 반복하고, 실내에서는 중국어 성조 연습을 했다. 아침식사 후 저녁식사 때까지[* 점심식사는 없었다.] 6시간 반 동안, '혁명 문제', '한국어문' 등의 학과수업 두 과목을 수업하고, 자습, 낮잠, 진찰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식사는 반찬 두 가지와 국 한 가지였다고 한다. 저녁 식사 후 '과외활동'으로 공놀이, [[장기]]놀이, 노래, 세탁 등을 했고, 해가 지면 방 하나에 1개씩 있는 전등불이 켜졌다. 대원들은 자습, 편지쓰기, 독서, 원고쓰기, 일기 쓰기 등을 한 후 8시 반에 점호를 받고 '전지공작대 군가'를 부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마쳤다. [[박기성(독립운동가)|박기성]]이 '오양준(歐陽軍)이라는 필명으로 1941년 9월 1일 <한국청년>에 개재한 '훈련수기'에 따르면, 1941년 7월 5일에 대원들이 종남산으로 행군해 종남산 아래의 천자두촌 마을에서 아침 식사를 한 뒤 수개 조로 나뉘어 자유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깃발을 꽂은 장대 등을 든 [[중국인]] 수천 명이 소리를 지르며 몰려왔다. 대원들은 아연 긴장하여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중국인들이 몰려온 내막은 이랬다. 가뭄이 계속되어 천자두촌 주민들은 보름 동안 [[기우제]]를 지내왔고, 마지막 날인 이날 이웃마을인 화리촌의 주민들이 와서 함께 기우제를 지내기로 했다. 그런데 화리촌 주민들이 천자두촌의 사당 앞을 무례하게 지나가자, 두 마을 주민 간에 시비가 붙었고 급기야 동네 싸움으로 번진 것이다. 이때 나월환 대장이 나서서 그들을 설득했다. >우리는 외국인이다. 오늘 이 곳에 와서 여러분이 이렇게 싸우는 모습을 보니 정말 가슴이 아프다. 생각해 보라, 지금은 일본놈들이 침략해 있는 때이다. 여러분은 왜 일본놈들을 상대해서는 이렇게 싸우는 투쟁정신을 갖지 못하는가? 두 마을 주민들은 연설에 감동해 화해했고, 이어서 '중한군민연합대회'가 열려 500~600명의 두 마을 주민이 참여해 노래 시합, [[하모니카]] 연주 등을 하며 서로 친목을 다졌다. 다음날 새벽, 대원들은 두 마을 주민들로부터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제안을 받았지만 민폐를 끼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부대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렇듯 훈련생들을 잘 길려낸 나월환은 1940년 3월 1기생을 편성해 4월부터 7월까지 훈련시킨 뒤 9~10월 전방으로 파견했고, 1941년 2월엔 2기생을 교육시켰으며, 1942년 2월부터 사망할 때까지 3기생을 교육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