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치즘 (문단 편집) == 역사 == 파시즘 같은 [[제3의 위치]]에서 추구하는 민족적 사회주의는 [[조합주의|코포라티즘적]]인 국가, [[조합주의]] 경제체제를 선택하였다. 집단과 공동체를 개인보다 우선한다는 의미에서 사회주의적 아니냐라고 말할 수 있지만 오늘날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프롤레타리아]]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사회주의와는 차이가 있다. [[카를 마르크스]]는 국가가 폐지되고 모든 경제를 노동자가 쥐는 [[직접민주주의]]적, [[개인주의]]적, 코뮌주의[* 국가와 자본에 사로잡히기를 거부하며, 자유로운 개인들의 개성과 차이가 존중되는 공동체적 삶을 꿈꾸는 사상적 경향. 자본주의 시장 경제나 그를 지지하는 정치 체제를 거부하고 삶의 전 부문에서 평등한 공동체적 삶을 지향한다는 것이 특징.] 사회를 추구하였고,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를 거부하고, 만국의 노동자들이 단결하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주장한 반면에 파시즘은 노동자뿐만이 아니라 [[부르주아]]를 포함한 모든 민족 구성원이 참여하는 민족공동체를 추구하였고, 자유주의(자본주의)와 마르크스식 사회주의(공산주의)는 물론 [[아나키즘]]과 같은 사상 역시 반민족적인 외세(특히 유대인)의 사상으로 보고 반대하였다. [[파일:나치 독일 반유대주의 포스터.jpg|width=40%]] 나치독일의 포스터 : 적들의 배후에는 유대인이 있다. >[[연합국|우리의 적들]]이 꾸미는 모든 음모의 배후에 국제 [[유대인|유대주의]]가 있다는 진실을 끝까지 깨닫지 못한다면 [[제2차 세계 대전|이 전쟁]]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유대주의는 이데올로기의 차이와 이해관계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모든 연합국들을 한데 묶어두고 있는 접착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볼셰비즘]]은 동일한 유대적 뿌리에서 나오며, 한 나무의 다른 두 가지처럼 결국에는 같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국제 유대주의는 많은 국가들과 민족을 압제하여 복종시키기 위해서, 이 두 가지 이데올로기를 적절하게 사용한다.''' >---- >[[파울 요제프 괴벨스]], [[https://archive.org/details/RedeGoebbelsDieUrheberDesUngluecksDerWelt21011945|1945년 1월 21일 베를린, 주간지 'Das Reich']] 간혹 나치즘의 생산수단의 적극 통제를 마르크스주의의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는 시선도 있으나, 두 개념은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의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본질적으로 '''노동자의 생산수단 통제'''라는 것에 의의가 있다. 다시 말해 노동자 계급이 생산수단을 완전히 통제함으로써 '''착취받지 않는 것이 그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 반면 나치즘이 추구한 것은 생산수단을 국가권력이 통제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이 노동자 계급의 생산수단 통제로 전혀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치즘은 국가(정확히는 '''민족''') 그 자체를 우선시하였기에 계급투쟁을 철저히 탄압하였으며, 자본가 역시 '민족'의 구성원으로써 특권을 유지했다. 아니, 오히려 나치당은 집권하는 과정에서 자본 계급과 제휴관계를 맺어온 역사를 가졌으며 '민족'의 안녕에 반하지 않는다면 자본가 계급을 보호하는 입장에 가까웠다.[* 물론 집권 이후 극우파가 정권을 장악하기 이전에는 자본가 역시 말살시키려는 입장이었던 [[좌익 파시즘]] 계열 역시 존재하긴 하였으나, 이들은 [[장검의 밤]] 등의 숙청 과정을 통해 사실상 소멸한다.] 나치즘을 사회주의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는 의견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념을 근간으로 세워진 국가들이었던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대개 국유화로 치환하는 형태의 사회구조를 가진 것이 나치즘의 생산수단 통제와 비슷한 것으로 보인 것에서 나타난 것이다. 더군다나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은 비록 집산주의적이긴 하였으나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기본적으로는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것이었음[* 중앙집중적이긴 하였으나 공산주의 국가에서 생산수단은 기본적으로 자치제로 운영되었으며, 냉전 시기 사회주의 국가들은 대개 지니계수가 0.2~0.25 즈음에서 형성되는 등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행보를 다수 보이긴 했다.]을 생각하면 더더욱 둘은 같은 맥락이라고 보기 어렵다. 즉 파시즘이 말하는 사회주의의 주체는 프롤레타리아 노동자계급이 아니라 민족 '''더 나아가서 고대 독일인의 순수성으로 돌아가는 비이기적이고 희생적인 민족이었다.''' 따라서 파시스트들은 '''모든 민족은 자기 민족만의 사회주의가 있다.''' 라는 주장 아래 자신들의 사상을 '''독일 민족 특유의''' 민족적인 사회주의자라고 자칭하면서, 유대인이 만든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는 [[볼셰비즘]](유대-볼셰비즘)이라고 불러서 구별하였다. 민족에 기반한 사회주의였기에, 민족의 순수성과 우월성을 해치는 열등한 존재들을 제거하려고 하였고, 민족복지의 차원에서 민족의 생활권인 [[레벤스라움]]을 확보할 것을 주장하는 팽창주의적 태도가 나타난다. 나치즘은 니체철학의 위버멘쉬 사상과 힘에의 의지, 고비뉴의 '인종 불평등론',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의 '19세기의 기초', [[시온 의정서]], [[헨리 포드]]의 저서 '국제 유대인' 등의 영향을 받았다. >괴벨스는 엘버펠트의 홀츠 거리에 있는 사무국에서 밤을 새우며 작업을 하여 1월 초에 초안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이 초안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보다 약 2개월 전 그자 작성했던 <나치즘의 ABC>로 초안의 내용을 재구성해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나치당 정책의 목표는 "독일의 민족 동지 중 억압받는 계층들"의 '자유와 빵'을 위한 권리를 쟁취하는 것이다. "한 민족이고자 한다면 그중에서 억압받는 계층에게 정치적 자립성, 자유와 재산을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사유재산의 재구성과 제한을 위한 농업 혁명을 요구했고, 공업 부문, 즉 '생산적 자본'에서는 주요 기업들의 '[[국유화]]'를 추구했다. >그는 '나치 독일의 자유'에서 주적은 '증권 자본주의'라고 생각했다. "증권 자본은 생산적 자본이 아니라 기생적이고 탐욕적인 자본이다. 그것은 땅을 딛고 선 것이 아니라, 고향을 잃고 국제적이 되었다. 증권 자본의 활동은 생산적이지 않으며, 단지 이윤을 끌어내려는 목적에서 생산의 통상적 과정에 개입할 뿐이다. 그 자본은 유동 가치, 즉 현금으로 존재하며, 주된 주체는 [[유대인 배후자본설|유대인 금융 자본]]이다. 이들은 생산하는 대중을 자신들을 위해 일하게 하고 이를 통해 노동의 이윤을 자기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의회 민주주의 체제라는 '간판'을 내건 '증권 자본'은 [[마르크스주의]] 지도자들과 손을 잡는데 이는 이들이 유대 인종이라는 동일한 뿌리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 둘이 독일의 자유를 막는 주적이다. 나치는 이들에 맞서 '백병전'을 벌이려 한다. >... >12월에 아르투어 묄러 판 덴 브루크의 '예언적 전망'인 <제 3제국>을 읽기 시작한 괴벨스는 미래 나치 독일의 서방 지향을 단념했다. 그는 젊은 대학생 시절부터, 러시아 극작가들을 받아들이면서 러시아 민족의 본질이 독일과 닮아 있음을 깨달았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문학에도 인간 존재를 둘러싼 근본 물음이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그는 1924년 <민족의 자유> 편집인으로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민족적 정화를 위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썻다. 그는 러시아가 "언젠가 자신들의 최대 사상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정신 속에서 깨어나게 될 것"을 확신하였다. 이때 괴벨스는 "유대인의 국제주의에서 해방된" 러시아, "물질주의를 영영 거부하고" "사회주의적 민족국가"를 쟁취할 러시아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국가사회주의 서한>에서 러시아는 "서방의 악마적 유혹과 부패에 대적하는 우리의 타고난 동맹자"이기 때문에 독일과 함께 이 길을 갈 것이고 독일의 모범이 될 것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152~154p >어떻게 이 도시, 우리가 6년 전 몇 안 되는 사람들로 시작했던 이 도시에서 진정 전 시민이 들고 일어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저 아래에서부터 노동자, 부르주아, 농부, 학생 군인들이 행진하였는지를 보는 것은 그야말로 감동적인 일이다. 그 위대한 '''민족공동체'''에서 우리는 그가 유산계급인지 무산계급인지, 가톨릭 신자인지 개신교 신자인지 더 묻지 않는다. 우리는 오로지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어디에 속하는가, 당신의 나라를 신봉하는가 물을 뿐이다. >----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391p >그는 "부르주아적인 점잔" 따위는 집어치워야 한다고 과도하게 목소리를 높였고, 미칠 듯한 박수 갈채가 끝나자 총력전이라는 자신의 요구 사항으로 접어들었다. 그에 따르면, 총력전은 시대의 요구였다. 괴벨스는 사회주의로부터 영감을 얻은 과거 자신의 사고방식, 그러나 결코 실현된 적 없는 ''''민족공동체''''라는 비전을 다시 끄집어내어, 당은 신분과 직업 등을 결코 고려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신분이 높거나 모두 같은 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볼셰비즘과는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볼셰비즘을 이기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782p >'''민족공동체 개념은 나치체제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개념이다.''' 나치는 민족공동체의 형성을 약속하면서 정치와 경제, 사회의 모든 분야를 민족공동체 이데올로기에 따라 재구축하고자 했다. 연구개념으로서의 민족공동체는 첫째, 나치에서의 변화된 정치적·사회적 권력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며, 두번째 사회적 약속을 통해 주민들을 동원하는 기제이며, 세 번째 나치체제의 통합과 배제의 특성을 지칭한다. >나치의 사회정책은 민족공동체 이데올로기와와의 연관성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 나치는 계급투쟁을 극복하고 민족공동체를 수립한다는 명분으로 사회적 파트너쉽에 기초한 바이마르의 노동질서를 폭력적으로 파괴하고 기업공동체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새로운 나치적 노동질서를 수립하였다. 민족공동체와 업적공동체를 수립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노동전선은 노동자들을 규율하는 동시에 체제 내로 통합하기 위한 다양한 사회정책적 활동을 벌였다. 노동전선의 산하조직인 기쁨을 통한 힘은 여행, 스포츠, 문화활동 등의 다양한 여가를 노동자에게 제공함으로써 노동자들을 체제 내로 통합하고자 시도하였다. 노동의 아름다움은 공장의 환경을 개선하고 합리화함으로써 노동의 생산성을 높이는 동시에 노동자들의 통합을 촉진하려는 시도였다. >사회보험분야에서 나치는 조직을 통합하여 행정합리화를 추진하는 한편 보험료는 올리고 급여는 낮추어 재정의 안정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사회보험의 구체적 운영은 인종주의적 특성을 보여주며 군수산업과 전쟁준비에 복무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복지분야에서 민족복지회는 나치 최대의 조직으로서 인종주의에 입각하여 사회적 약자가 아닌, 민족의 동지와 ‘가치있는 자’에게 다양한 후생복지혜택을 제공하여 미래의 건강한 민족을 재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들에게 복지는 개인이 아니라 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민족복지회의 활동은 근대적 성격의 가족·인구정책을 발전시켰지만 그것은 철저히 인종주의에 기반하고 있었다. 월동구호단은 민족은 스스로 돕는다는 구호 아래 전국민을 대상으로 대규모 자선모금활동을 벌였고, 이것은 민족공동체의 실현의 징표로서 선전되었다. >나치 사회정책의 많은 부분은 독일제국과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이어지는 근대화 과정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민족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나치의 사회정책은 복지국가의 민주주의적 성격을 제거하고 근대적 주체로서의 개인의 자리에 민족을 대치함으로써 퇴행적인 특성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 >신명훈, 독일 복지국가 담론의 역사: 나치의 민족공동체 이데올로기와 사회정책, 독일연구 2015, vol., no.29, pp. 155-198 (44 pages)[[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011747|#]]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자가당착, 그리고 이 두 이념의 종합은 독일 사상사의 핵심 내용이다. 1918년에서 1945 사이의 이데올로기 논쟁은 이를 둘러싼 것이었다. 1918년에 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이에 따라 과거로부터 전승된 자부심이 손상되고 전통적인 프로이센 군주 질서가 파괴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립과 함께 변화된 정치 조건에 대항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새로운 방향을 획득하려는 시도가 시작된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의 핵심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종합하려는 이론적, 이데올로기적 논의이다. 이러한 이론적 논의의 전개는 NSDAP(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나치당)의 건설과 확장과정과 일치한다. '''1933년의 나치의 권력 획득과 함께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종합은 공공연히 사회전반에 적용된다. 민족 부르주아지 측에서 보면 “사회주의적”인 것은 “민족사회주의”나 좀바르토(Sombart)가 말하는 “법치 사회주의”이며, 이들은 좌파 사회주의, 즉 맑스 사회주의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으로 스스로 이해되고 있다.''' 1933년 이전까지의 논쟁에서는 여러 입장들이 주장되었지만 1933년 이후에는 단지 히틀러를 사회주의 혁명가로 표현하고 우상화하는 글들만이 만연된다. (1933년 이전의 논쟁에서 사회주의 개념을 둘러싼 논쟁은 아직 정리중입니다. 하지만 몇 가지 특이할 사항은 사회주의를 민족의 공동체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한 근거는 민족과 사회주의를 접합시키려는 노력이외에도 1890년대에 발행되어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퇴니스 (Toennis)의 저작 “공동체와 사회(Gemeinschaft und Gesellschaft)가 1920-30년대에 6판까지 발행되었다는 점이다 자세한 논쟁은 준비중”) >... >'''독일의 부르주아지 이론가들에게는 자본주의 역시 “서구적인 것” 또는 “유대인의 상인정신”의 전형적인 산물로써 비난받았다''' (대표적인 학자가 좀바르트). 민족적인 입장으로 정리한 사람은 자본주의를 어떤 “낯선 것”, “서구로부터 강제된 체제” 또는 “증오스러운 자유주의의 경제체제”로 간주하였다. 자본주의와 사적 소유의 차용으로 독일은 서구의 규칙에 종속되었다. >----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에서 민족사회주의로의 이행: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의 독일 논쟁정리[[https://www.krm.or.kr/krmts/link.html?dbGubun=FRBR&metaDataId=4b76f6dc145edc45011463870cdb2a79|#]] 그렇기에 이들이 말하는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는 차별화되는, 오히려 [[반동주의]]인 모습을 띄게 된다. 여기에 대해서 '''민족사회주의에서 고대 민족인의 순수한 사회주의'''를 애기하던 이들은 좌파를 이루게 되며 대표적인 인물로 [[에른스트 룀]], [[그레고어 슈트라서]], [[오토 슈트라서]], [[파울 요제프 괴벨스]](이후에 당내 좌파 숙청이후 히틀러의 딸랑이가 됐지만)가 있으며 이들은 철저하게 반마르크스주의적 관점으로 [[소련]]을 지지했다.[* 이들은 소련은 [[서구권]]의 타락을 배제한, 오직 [[슬라브인]]만의 슬라브식 사회주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련에서도 [[투하쳅스키]]처럼 [[신이교주의]]적 사회주의자가 있기는 했다.][* 출처: Minakov, Sergei Timofeevich (2017-09-05). Заговор "красных маршалов". Тухачевский против Сталина (The Conspiracy of the Red Marshals: Tukhachevsky vs. Stalin) (in Russian). Algoritm Publishing] 당내 [[우파]]는 고대 민족의 순수한 사회주의보단 현대 독일을 만든, '''현대 독일이라는 개념을 만든 이들의 순수성'''을 더 지향했다, 즉 이들은 [[독일인|독일 민족]]이란 개념이 만들어진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위시로 한 [[민족주의]]적 체제를 애기했다. >슈트라서 진영은 그동안 히틀러가 독일국가인민당에 접근하는 것과 유력 실업가들의 호의를 얻으려는 알랑거림을 비판해 왔고, 거침없는 반자본주의 노선을 과시하면서 포괄적인 국유화 조치와 [[소련]]과의 동맹을 주장했다. >----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258~259p 그렇기에 이런 '''순수성''', '''민족성'''을 애기했기에 이들은 [[신이교주의]]에 꽤나 빠저있었다. 특히 [[하인리히 힘러]]가 그 대표주자이기도 하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을 경험한 독일에서는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자유/자본주의 이념 및 체제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으며, 이는 1920년대 지식인들 사이에서 포괄적인 의미의 반(反)서구주의적 ‘[[보수혁명]](Konservative Revolution)’으로 나타났다. 그들 중 일부는 10월혁명에서도 사회주의적 성격보다 반서구적 측면에 주목했으며, 볼셰비즘을 자신들의 명칭으로 삼을 만큼 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의미상 대립적인 단어들의 결합인 [[민족볼셰비즘]]은 일견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19/20세기 유럽 사회주의 운동이 민족주의와 치열하게 싸운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계급 대 민족, 국제주의 대 민족주의의 대립으로 표현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갈등은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에서 특히 첨예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변적인 현실정치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갈등도 확고하고 항구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민족볼셰비즘이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민족볼셰비즘의 핵심 인물인 니키쉬(Ernst Niekisch)는 자신이 주도한 운동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저항운동은 순전한 서구의 이념들을... 거부한다. 로마의 지배사상, 로마법, 1789년의 사상, 문명의 이념들, 개인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부르주아적 세계관과 경제관 등 이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은 독일의 자유 투쟁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전제이다. ... 저항운동은무엇보다 정치적으로 단호하게 동구로 시선을 돌릴 것을 요구한다. ... 모든 수단을 동원한 군사력의 강화, 로마법적인 사유재산의 거부. 사유재산권의 제한, 자본주의적 경제 및 사회 체제의 폐기. 세계경제 체제로부터 포괄적이고 무조건적인 탈퇴.” 이처럼 민족볼셰비즘의 핵심은 자유/자본주의로 상징되는 서구의 거부와 친(親)동구에 있었다. >따라서 민족볼셰비키는 서구와 다를 뿐 아니라 대립적인 러시아를 우호적으로 바라보았다 >... >독일에서 패전과 베르사유 조약이 끼친 영향은 공산주의자들마저 민족주의적으로 만들만큼 컸다. 1차 세계대전을 시장의 분할을 둘러싼 자본들 간의 싸움으로 보고 전쟁을 거부하며 자본주의 체제의 타도를 외쳤던 독일 공산당조차 조약이 야기한 프랑스에 대한 증오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종전 직후 독일에서 반(反)프랑스 정서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민족을 배제한 채 계급만으로 노동자의 지지를 얻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민족이란 마르크스의 이론에서는 허구였지만 당시의 현실에서는 매우 구체적인 것이었다. >민족볼셰비즘을 처음 언급한 인물들은 1918년 독일 공산당 창당 멤버들이기도 했던 라우펜베르크(Heinrich Laufenberg)와 볼프하임(Fritz Wolfheim)이었다. 두 사람은 계획경제와 함께 독일이 러시아에 접근할 것을 촉구했다. 정복당한 독일은 두 ‘프롤레탈리아 민족국가’의 동맹을 통해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베르사유 늑약’이 독일 제국을 조각내자, '''독일 민족 거의 전부가 프롤레타리아화했고 혁명의 주체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민족을 대표하는 집단은 노동자계급이라고 보았다. 이들 두 사람은 민족해방의 주체를 노동자계급으로 보았다는 면에서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자였으나 베르사유 조약과 관련해서는 민족주의적인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 >윤용선, 러시아 10월 혁명과 독일 [[보수혁명]], 1920년대 [[민족볼셰비즘]](Nationalbolschewismus)을 중심으로, 2018, vol., no.39, pp. 5-33 (29 pages)[[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412979|#]] 나치즘이라고 말하는 민족사회주의는 독일의 Völkischer Nationalismus[* 이는 종족적인(ethnic) [[민족주의]]를 가리키는 말이다.]과 [[반유대주의]]에서 영향을 받고, [[파시즘]]의 전체주의적 사회 유기체론에서 시스템을 빌려왔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한창 인기를 얻던 [[보수혁명|보수주의 혁명 운동]]의 방식과 혼합되었다. 흔히 사용되는 '나치'라는 말은 ''''Nati'''onalsozialistische'의 'Nati'의 독일어 발음으로 정식명칭이 아니라 멸칭이었다.[* 다만, '나치'라는 말이 ''''Na'''onalso'''zi'''alismus'에서 따와 'Nazi'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민족사회주의 지지자들은 이른바 [[게르만족]]이 대표라고 주장한 '[[아리아인|아리아]]'이 타 [[민족]]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며 '[[게르만족]]'의 우월성과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지지하였다. 게르만 민족이 동유럽을 되찾아 [[생활권]]을 확보해야 하며 게르만 민족 이외의 아리아인들 역시 그들의 땅에서 지배민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매우 강경한 [[순혈주의]]와 [[국수주의]]. 나치즘은 전후의 [[독일]]에서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지만, 여전히 잔존 민족사회주의자들과 새로운 민족사회주의자들이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