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헌 (문단 편집) === 관직 활동, 그리고 황호와의 불화 === 238년에 [[유선(삼국지)|유선]]이 태자를 세우자 나헌은 태자사인으로 임명되었다.[* 국역 <양양기>의 경우에는 後主立太子(후주립태자)를 "후주(後主=유선)가 태자로 세워지자"로 오역함으로 언제 나헌이 관직에 올랐는지에 대한 논란이 조금 있었다. <동윤전>에서는 거의 동일한 구절이 등장하는데 先主立太子(선주립태자)가 "유비가 태자를 세우고"로 번역되는데다가 立(립) 자체가 세운다는 의미를 가짐으로 <양양기>의 내용은 유선이 태자를 세운 시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그후 서자, 상서이부랑으로 관직이 올랐다. 선신교위로 임명되어 [[오나라]]에 두 차례 사신으로 갔는데 이때마다 오나라의 대신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후일의 오나라와의 지독한 악연을 고려하면 아이러니한 부분. --???:그때까진 나도 몰랐다 저렇게 질긴놈인줄-- 나름의 출세가도를 달리던 나헌이지만 [[황호]]가 득세하자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황호가 정치에 관여하자 여러 무리들이 황호에게 붙었지만 나헌은 황호에게 붙지 않았고 분노한 황호는 나헌을 파동태수로 좌천시켰다. 화양국지에 따르면 [[종예]]가 내지로 돌아가자 나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고 하는데 이때가 258년으로, 곧 우대장군(右大將軍) [[염우]]가 파동도독을 맡자 영군, 독영안사가 되어 염우의 부관으로 활동했다. 파동태수, 영군, 독영안사에로의 활동은 <양양기>와 진서 <나헌열전>에서 동일하게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후일 영안에서 미친 방어력을 보였다는 점에서 염우와 함께 영안 정비에 힘쓰지 않았냐는 추측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