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낙랑군 (문단 편집) == 낙랑의 위치에 대한 다른 주장과 반박 == 위와 같이 낙랑군이 평양과 황해도 일대에 있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지만, 낙랑군이 한반도 내에 없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단재 [[신채호]]는 낙랑군이 한반도에는 없었고, 사실은 요동군을 갈라서 낙랑군을 만들었다고 주장했으며, [[정인보]]는 이러한 한사군 요령설을 기반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낙랑 공략을 요동 / 요서 공격으로 변화시키면서 [[요서경략설]]의 확대화를 심화시키는 기초를 마련했다. 그 이후의 주장에서는 대릉하나 난하 부근이라 하니 요동이 아니라 요서로 미는 듯. 아니 난하 요수설을 또 따라가면 거기가 요동이 되기는 한다. 왜 이 모양이 되냐면 정작 우리가 생각하는 '요동'은 원래부터 고구려의 것이 아니었냐는 것. 이렇듯 내적으로도 자체 모순이 심각하다. 다만 [[북한]]에서는 한사군 요서설이 예나 지금이나 정설이다. '감히 [[평양]]에 중국의 식민 정권이 들어섰다는 역사를 인정할 수 없다'는 식의 이유 때문인 것 같지만,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인 벽돌 무덤 등은 '한의 상인들이 교역하다가 세운 것 같다', '중국풍 무덤으로 지은 것이다' 등의 가설로 땜질하고 있다.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는 고고학계에서 가장 늦게서야 바뀌는 풍토가 묘제라는 사실로 반박 가능. 이해가 안 된다면 한국에서 '뼈를 묻겠다'는 말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더 정확하게 알려면 통일돼서 평양을 조사해야 할듯하다. 게다가 1990년대 이후 고조선의 수도를 다시 평양으로 비정하게 된 이후부터는 평양의 고조선은 멸망했으나 한사군은 평양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즉 한사군 시기의 평양은 공백 상태... 대충 '고조선인들이 저항해서 못 들어오고 이름만 있었다가 고구려가 빨리 커서 다 먹었다'고 때우는 듯하다. 다만 낙랑군 외에 고구려에 병합된 [[최씨낙랑국]]의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얼른 통일되어서 파 봐야 답이 나올듯. 또 아래와 같이 평양의 낙랑군 유물들은 전부 교역을 통해 들어온 것이라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 중국의 정사 문구, 저명한 중국 사가들의 주석, 평양 방면의 왕광 묘에서 출토된 낙랑태수 인장, 낙랑군 인구 조사 목간, 2,000여 기가 넘는 낙랑 고분 등으로 보아, 전한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낙랑군은 한반도에 설치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심히 문제가 있다. 고분에서 나온 이배(耳杯), 칠기(漆器) 등 유물은 무역이나 교류로 취득할 수 있는 것이므로, 설사 그것이 낙랑 고분에서 나온다고 하여도 그것만으로 전한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한사군이 처음부터 한반도에 설치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또 낙랑군 목간은 이동이 가능한 것이므로, 평양 방면에서 낙랑군 목간이 발굴되었다는 것만으로는 낙랑군이 전한 때부터 서북한에 설치되었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쉽게 요약하자면 '낙랑군 유물 그런거 다 무역이나 교류를 통해 평양에 온 것이다. 다른 곳의 낙랑군 유물을 교류로 얻었을 수도 있는 건데 어떻게 그런 유물들이 평양에 있다고 평양이 낙랑군이라고 확신하냐!'이다. 물론 교류를 통해 얻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유물의 수가 너무 많다. 평양에서 오직 낙랑군 물건만 수입했을리는 없다. 그리고 이 주장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평양의 중국식 무덤 수천 기는 은근슬쩍 얘기에서 빼놓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평양 일대 외에 요동/요서에서는 낙랑군 유물이 발견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역사학에서는 기록보다도 유물⋅유적을 더 중요시한다. 마치 《삼국사기》에는 마한이 서기 9년에 멸망했다고 나오지만 마한 관련 유물⋅유적 때문에 마한이 5세기까지도 존재했다는 게 인정받는 것처럼 말이다. 즉, 요서나 요동에서 낙랑군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되지 않는 한 그 지역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인정될 리가 없다.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식민사학계에서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기득권을 내려놓기 싫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주장은 그냥 헛소리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들 중에선 평양을 방문하여 낙랑군 조사를 한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한국 역사학계를 평가절하하는데, 물론 평양이 [[북한]]의 수도가 되어버린 지금 방문 조사 및 현지 발굴이라는 귀중한 기회를 얻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전하는 문헌 자료 및 발굴 자료의 기초적인 정합성을 확인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므로 지나치게 [[불가지론]]적인 태도이다. 이런 논리라면 [[일제강점기]] 평양을 발굴 조사했던 식민 사학자들의 주장의 신빙성이 남한에서 나오는 낙랑군 연구보다 높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현대의 고구려나 발해 연구는 만주를 보유하고 있으며 고구려, 발해에 대한 발굴 자료도 통제하고 있는 [[중국]]의 것이 남한의 것보다 뛰어나다는 식으로 귀결된다.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어찌됐든 북한의 발굴 조사 자료가 남한 학계에 보고되는 것 자체는 사실이며 전근대에 보고된 문헌 자료는 대부분 한국에서도 확보하고 있으므로 연구에 결정적인 지장까지는 없는 상태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