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낙원상가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1968-06-18)낙원상가 공사현장.jpg|width=500]] [[http://opengov.seoul.go.kr/sites/default/files/editor/(1968-06-18)낙원상가%20공사현장.jpg|1968년 6월 18일 낙원상가 공사현장]] 낙원상가가 들어서기 전, 이 장소에는 '''낙원시장'''이라는 재래시장이 있었다. [[6.25 전쟁|한국전쟁]] 이전부터 있던 꽤 역사깊은 시장이었다. 이 시장은 1967년 낙원상가가 들어서고 나서 일부가 남았고, 남은 부분은 떡집이 들어서면서 꽤 유명해졌다. 1990년대까지 낙원상가 옆의 떡집들은 전국구로 유명했고, 전국에 "낙원떡집"이라는 상호가 우후죽순으로 생기는 원인이 되었다. 이 낙원상가 옆 떡집들은 2000년대로 넘어가면서 하나둘 사라졌고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1960년대 서울특별시는 안국동에서 [[종로]]를 남북으로 관통하여 [[한남동]]으로 가는 간선도로를 계획하고 있었다[* [[남산1호터널]]과 [[한남대교|제3한강교]]가 이 간선도로 계획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도로 예정지에는 낙원시장이 있었고 도로를 개설하려면 철거가 불가피했다. 서울시는 시장 상인들과 협의 끝에 시장을 철거하고 도로를 개설하되, 도로 위에 상가와 아파트를 건설하여 시장 상인들을 입주시키기로 했다. 시장 상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이 상가로 입주했고, 상인 조합은 낙원상가주식회사를 창립하여 이 건물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러나 완공 이후 당시 건축법을 위반하는 등 자잘한 말썽이 있기도 했다. 원래 8층으로 허가받은 건물을 15층까지 올린 것. 논란 끝에 구조상 문제는 없는 것으로 결론나고[* 2010년 이후에 받은 건물 안전 검사에서도 B 등급이 나왔다. 완공된 지 50년 된 건물 치고는 상태가 상당히 좋은 건물이다.] 서울시는 이 건물을 양성화 조치했다. 그 이후에도 낙원상가 밑의 도로가 너무 컴컴하다는 문제점과 화재에 대한 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등의 여러가지 자잘한 문제점이 나왔다. 1970년대 낙원상가는 원래 낙원시장 대체용도였기 때문에 시장 상인들이 들어와 있었고, 2층의 경우 의류 매장이 거의 주류를 이루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1970년대 초, 정부가 전국에 풍금과 피아노를 공급하기 위한 정책으로 수요가 많이 뛰면서 [[탑골공원]] 등지에 '파고다 아케이드'라는 건반 악기 상가가 들어서 있었고, 바로 옆 종로 2가에는 관악기 관련 점포들이 모여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정부가 1979년 탑골공원 정비사업으로 그 자리에 있던 파고다 아케이드를 철거하고 이들을 낙원 상가로 옮긴 것이 낙원상가가 악기 점포들이 들어서게 된 효시라고 한다. 1980년대엔 [[전두환]] 정권이 [[통행금지]] 조치를 해제함과 동시에,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1988 서울 올림픽]] 등 많은 국제 행사를 위해 유흥업소 관련 규제를 많이 완화했던 상황이었는데, 그로 인해 폭발적으로 늘어난 라이브 밴드 수요와 더불어 수입 규제가 완화되면서 국내에 들어온 [[야마하]] 등 양질의 수입 악기들은 성장기에 있던 낙원상가를 크게 번영시켰다. 또한 당시 낙원상가는 악기 도·소매상가뿐만 아니라 연주자 양성소 역할도 했다. 당시에는 대중음악, 현대의 표현으론 '실용음악'을 체계적으로 가르칠 시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낙원상가는 각종 악기를 단기간에 배워 유흥업소에 악사로 취업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이런 라이브 밴드의 호황으로 각종 기타, 드럼 등 여러 악기들도 취급하는 상점이 하나둘 늘어 1982년엔 3층의 전체가 악기점으로 채워졌으며, 4층의 있던 사무실들은 악기점들의 물류창고로 쓰여지게 되었다. 아울러 1990년대 초 이전까지 낙원상가는 사실상 서울에 모든 연주자 관련 구인-구직정보가 모이는 음악인력시장의 메카였다.[* 이 사실은 방송을 통해서도 언급됐는데 이를 말한 사람이 다름아닌 [[김흥국]]이다. [[https://youtu.be/KrkLY88LAOI?t=1185|2008년 9월 MBC 라디오 스타에 출연해서]] [[김태원(음악인)|김태원]]과 함께 낙원상가에서 취업했던 과거 이야기를 언급했다. 김흥국은 1986년 솔로 가수로 데뷔하기 전까지 밴드 생활을 했다.] 때문에 당시엔 악기를 취급하지 않고 사무실에 전화만 여러 대 설치하여 전문적으로 업주와 연주자를 중개해주는 업소가 따로 있었을 정도였다. 그로 인해 낙원상가는 전문 연주자를 낮에 점원으로 고용하고 일반인들에게 악기를 판매하는 업주, 낮에 점원으로 일하며 악기 판매와 악기 레슨을 해주는 전문 연주자, 전문 연주자들을 밤에 유흥 업소와 연결해주는 중개업자, 그리고 전문 연주자들에게 악기를 배우거나, 악기를 사려는 일반인들로 복잡한 생태계를 이루어 최고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1990년대 후반 [[1997년 외환 위기|경제 위기]]로 불황으로 유흥업소들이 문을 닫거나, '[[가라오케]]'의 등장으로 인건비가 비싼 라이브 밴드대신 가라오케를 설치하면서 전국의 전문 연주자 시장이 폭망하고야 말았다. 그에 비례해서 자연스레 악기수요도 나락으로 떨어졌는데, 이 때 뜻밖에 낙원상가를 살린 것은 교회 수요. 미국 개신교는 1980년대 후반부터 찬양에 밴드를 동원하는 회중찬양이 유행했는데 이게 한국 개신교로 넘어오면서 교회마다 밴드팀 하나씩 꾸리는게 유행처럼 번졌다. ~~연주실력이 좋다고는 안했다~~ 현재 활동중인 프로 뮤지션들 중에 [[개신교]] 출신[* 현재 신앙여부가 아니라, 과거 교회 [[CCM(음악)|CCM]] 밴드에서 활동했던 적이 있는 경우까지 포함한 것.]이 적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2000년대 후반 교회 수요가 한 풀 꺾일 즈음[* 밴드 찬양에 대한 관심이 줄었다기 보다는 개신교 자체의 교세가 많이 약화됐다.], 소위 '실용음악'이라는 분야가 생기고 [[전문대]]와 4년제 [[대학교]]에도 [[실용음악과]]가 신설되었으며, 2000년대 후반 [[FT아일랜드]] 같은 [[아이돌]] 밴드의 지상파 등장, 2010년대 초반 [[세시봉]] 열풍과 [[버스커버스커]]를 위시한 젊은 [[포크송]] 밴드의 등장,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의 제작 등으로 인해 다시 일반 대중의 악기 수요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한편 건물에 대해서는 1980년대 말부터 철거 이야기가 꽤 많이 나왔었다. 당시에도 20년 정도가 지나 꽤나 노후된 구식건물이었고 도로 위에 서 있다는 문제점, 그리고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실제로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있는 낙원상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흉물스럽다는 반응이 많다. 2008년 [[오세훈]] 시장이 [[뉴타운]] 공약을 내세우면서 오래된 건물을 대거 철거할 때 [[세운상가]]와 같이 철거될 뻔했다. 그러나 2011년 [[박원순]] 시장이 이들 사업을 대거 중지하면서 현재는 [[도시재생]]으로 방향성을 전환했고, 결국 낙원상가는 철거되지 않고 --흉물스럽게-- 남아있게 되었다. 세운상가는 워낙 여러 소유주간에 이권이 얽혀있어서 재건축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인데, 낙원상가는 원래 보상이 불가능한 도로위에 위치해서 철거하면 백퍼센트 국가가 생돈으로 보상해줘야 되는 문제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