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난중일기 (문단 편집) == 여담 == * [[http://www.memorykorea.go.kr/|국가 기록 유산]] 사이트,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232A|고전 번역원]]에서 난중일기와 이충무공전서를 열람할 수 있다. 번역은 없지만 한문을 읽을 정도의 한자 지식이 있는 사람은 읽어볼 수 있다. * 난중일기에서 가장 내용이 긴 일기는 정유년(1597년) 9월 16일의 일기다. 다름 아닌 '''[[명량 해전]]'''을 치르던 날의 일기이다. 명량 해전은 이 충무공 역시 일생에서 가장 길었고, 긴박한 시간으로 느꼈을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오죽하면 이날 일기 마지막에 '실로 천행한 일이었다.'라고 덧붙였을 정도이니. 난중일기 곳곳에 장군의 감정이나 생각이 잘 드러나는 편이지만, 무엇보다 이순신의 감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일기는 정유년 일기다. 이 해에 워낙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파직, 고문, 백의종군, 모친상, 명량해전, 아들의 전사까지 모두 정유년 한 해에 일어났다.] * 문화재청에서는 난중일기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기로 하고 2012년에 신청서를 [[유네스코]]에 제출하였다. 이후 2013년 6월 18일 세계 기록 유산 국제 자문 위원회(IAC)의 최종 심사를 거쳐 [[새마을운동]] 기록물과 함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이로써 2015년 10월 9일 기준 '[[이산가족을 찾습니다|특별 생방송 이산 가족을 찾습니다]]'와 [[한국의 유교책판]]이 추가로 등재되면서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된 한국 기록물은 13개가 되었다. 아시아에서도 독보적인 1위이며 세계구급으로도 상당히 많은 편.(3위) * 난중일기에는 짤막하게 여진(女眞)이라는 문구가 등장하는데, 이제까지 이순신과 관계한 여인의 이름으로 해석되어 난중일기가 유명해지는데 한 몫 했다. 번역될 때에도 그렇게 번역했지만[* [[칼의 노래]]에서도 이 설을 따랐는데, 여기선 아예 '''덮쳤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최근에 이것이 오독이라는 주장이 있다. * 위에서 여러 번 언급되었듯이 노승석 교수는 1935년에 난중일기를 해독하던 일본인이 女眞'''共'''(여진공)을 오독해 女眞卄(여진입), 女眞卅(여진삽)이 되어버렸다는 주장을 했는데, 고전 및 초서 전문가들 다수가 이 의견에 공감했다. 상기한 '공(共)'자는 난중일기 내에서 단순히 함께했다는 뜻으로 사용된 용례가 명확히 있으며, 따라서 女眞共(여진공)을 해석하면 그냥 노비들을 불러 심부름을 시키거나 노가리를 깠다는 뜻이 된다. * 이용호 박사는 여진(余陣, 직역하면 내 [[군부대|진영]])을 잘못 오독해 여진(女眞)이 되었다는 의견을 냈다.[[http://joongdo.co.kr/jsp/article/article_view.jsp?pq=201104270201|#]] 원문에는 여진 뿐 아니라 여진입(卄. 스물), 여진삽(卅. 서른)이라는 문구도 있는데, 이 역시 이순신 진영의 병사 20, 30명이라고 주장했다. * 그리고 난중일기를 좀 더 뒤져보면 관비 4명과 잤다는 언급도 있는데, 기존의 통설에 따르면 저 문구는 관비 4명과 집단 성교를 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게 좀 황당하기도 하거니와 구체적으로 동침(與)이란 글자가 들어가지도 않아서 그냥 같이 어울리다 돌려보내고 혼자 자러 간 것이라는 설도 있다. * 여하튼 난중일기에서 여진이라는 여자랑 같이 잤다는 해석이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사실인데, 2020년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사망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클리앙에서 한 유저가 해당 내용을 언급하면서 [[박원순]] 전 시장을 옹호하여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9963502|#기사]] [[http://mlbpark.donga.com/mp/b.php?p=1&b=bullpen&id=202007150045081965&select=&query=&user=&site=donga.com&reply=&source=&sig=hgjcHl-YihXRKfX2hgj9Sl-g6hlq|#정리글]]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나, 실제 난중일기는 총 8권이 있어야 한다. [[정유재란|정유년]]을 다룬 정유년의 일기가 정유일기, 속정유일기 두권으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이다. 누락된 부분은 1595년 을미년을 다룬 을미일기로 이는 [[http://www.cha.go.kr/html/HtmlPage.do?pg=/heritage/world_heritage/record_treasure_10.jsp&mn=NS_04_04_04|문화재청 홈페이지]]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다. 한국사에서 난중일기의 역사적 위치가 위치인 만큼 이 '을미일기'가 발견된다면 [[임진왜란]] 중 을미년의 내용이 상당히 바뀔 것이라는 평도 존재한다. 다만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135100002&ctcd=C01|기사]]에 따르면 이미 [[이충무공전서]]에 을미일기의 내용이 반영되어 있어 중요한 부분은 알려졌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 기사에선 충무공의 다른 유물들의 허술한 관리 실태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으니 관심있으면 읽어보자. * 난중일기 중 한 페이지에는 이순신이 사인을 연습한 듯한 흔적이 남아 있다. 단 사인 연습이 아니라는 설도 있으며 이에 대해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https://www.instagram.com/p/CHUKNmZnRuN/?igshid=znsx0hdjnu6k|#]] [[스펀지(KBS)|스펀지]]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소개한 바 있다. * 유튜브 채널 [[Extra Credits]][* 게임 개발자가 진행하는 채널로, 주로 게임과 그 구성 요소들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을 한다. 그러나 별도로 'Extra History'라는 코너에서 역사 관련 영상도 올리고 있다.]에서 이순신 이야기를 시리즈로 연재하였는데.[[https://www.youtube.com/watch?v=3ieaDfD_h6s&t=4s|#]][* 평가도 좋고(좋아요가 평균 8천에 100만을 넘으며 댓글도 다들 정말 대단한 인물이라는 반응.), 고증도 적절한 편이다.] 시리즈 마지막까지 보면 고증 담당자가 나와서 관련 이야기를 하는 영상이 있다. 그런데 그 고증 담당자 왈, 자기가 찾아본 자료 중 난중일기가 제일 이순신에게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타인들은 이순신을 찬양하거나 부풀리기 바빴던 반면 난중일기는 이순신 본인이 담담하게 자기 이야기를 적어넣은 것이니 그럴만도.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45374458|#]] * 가끔 나중에 썼다고 "나중일기"라는 드립이 나오기도 한다.[* [[와탕카]] [[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titleId=15938&no=1&weekday=sun|1편에서]] 소재로 써먹은 적 있다.] 실제로 "난중"은 전라도, 경상도 등 남부 지방에서 "나중"이라는 뜻의 사투리로 쓰기는 한다. * [[인터넷]] 등지에서는 [[영남]] 지역을 비하하기 위해 '이순신이 난중일기에서 영남 출신 군졸을 폄하했다' 등의 주장이 보이지만 이는 당연하게도 전혀 근거가 없다.[* 이와 비슷하게도 [[전라도|호남]]을 까내리려는 목적으로 [[왕건]]의 [[훈요 10조]]가 많이 언급되지만 [[왕건]]이 언급한 지역은 [[청주시|청주]] 일대라고 봐야한다. 애초에 [[왕건]]이 왕위를 물려준 [[왕무]]부터가 [[전라도]] [[나주시|나주]] 출신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