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난징사건 (문단 편집) === 배후 조사 === 이후 우한 정부는 외교부 비서 위각 등을 파견하여 사건의 배후를 조사하게 했다. 위각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상부에 보고했다. ||우리 군이 입성할 무렵에 적군의 대부분은 이미 퇴거한 뒤였으나 적의 잔병은 아직도 완전히 제압되어 있지 않았고, 성내의 질서도 일시적으로 미회복 상태였다. 난징의 반혁명분자는 기회를 틈타 지방의 유민과 패잔병을 선동하고, 사전에 우리 군의 포로로부터 탈취한 제복을 입혀 혁명군으로 변장시켜 소동을 일으켰다.|| 국민당 우파는 '반혁명분자'의 배후를 소련 고문 [[미하일 보로딘]]으로 보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는 당시 코민테른은 7차 회의를 통해 국민대중에 의한 외국인 배척을 선동, 유럽 제국과 국민혁명군의 충돌을 조장한다는 내용을 결의하고 국민당과 열강의 다툼을 모의하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1926년 11월의 난창 점령에서 관련 서류들이 노획되면서 밝혀진 바가 있다. 또한 6군 정치부 주임 임조함과 2군 정치부 주임 이부춘(李富春) 등의 공산주의자들은 총사령관 청첸을 포섭하여 그가 공산당에 협조한다면 강소 정무위원회 주석으로 임명해주겠다고 제안하여 청첸을 포섭한 바가 있는데 그의 휘하의 2군과 6군이 난징에 입성했으니 약탈과 폭동은 공산당이 사주한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이 밝혀지면서 베이징의 장쭤린은 4월 6일 소련대사관을 수색하여 그곳에 은거하고 있던 [[리다자오]] 등 공산당원과 소련 외교관 60여명을 체포하고 비밀서류를 압수했다. 소련의 대중 스파이 공작을 벌였다는 증거를 확보한 장쭤린은 [[4.12 상하이 쿠데타]]에 고무되어 4월 28일 리다자오 등 20여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한편 영국에서도 [[네빌 체임벌린]] 외상이 5월 9일 하원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난징사건은 사실 코민테른의 지휘하에 조직되고 발동되었다. 그 목적은 열강을 부추겨 장제스를 곤란에 빠뜨리게 하는 데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 사건 때문에 중국인민은 공산당원과 소련의 고문을 신용하지 않게 되었다. 영국 정부로서도 난징사건의 취급에 대해 방침을 바꿀 여지가 있다." 5월 12일 영국 당국은 런던의 소련 통상대표부를 수색하여 문서를 압수하고 대소련 단교를 결의했다. [[국민당의 2차 북벌]]로 베이징이 함락된 후, 장제스는 영국과의 교섭 끝에 해당 사건을 공산당의 폭동으로 규정하고 영국 측에 사과를 표시하며 배상을 약속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