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난징시 (문단 편집) === 6조의 수도로 번성하다 === [[파일:중국 난징 7.jpg|width=700]] 도심 동북부 치샤구에 남아있는 [[소량]] 시기의 능 석물 3세기 초 [[손권]]이 [[오나라]]([[손오]])를 세워 황제의 자리에 올라 이후 6조(六朝)의 도읍이 되는 기반을 닦게 된다. 원래 오나라의 수도는 회계(會稽: 현재 저장성 사오싱시)였는데 [[자치통감]]에 따르면 손권의 중신 [[장굉]]이 말릉이 도읍으로 적합한 땅이라 하여 권하였고 [[유비]]가 동쪽을 지나면서 손권에게 이곳으로 거주하라고 권유하여 212년 수도가 되었다.[* 강표전과 [[태평어람]]에 따르면 [[유비]]와 [[제갈량]]이 손권에게 이곳을 도읍으로 추천했다고 나온다.] 그러면서 명칭도 나라를 세운다는 의미의 건업(建業)으로 변경.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중 일부 작품에서 이 이벤트가 구현되어 있다. 내내 건업이 수도였던 건 아니고, [[형주 공방전]] 직후와 손호 때인 265년 - 267년 두 차례에 걸쳐 잠깐 우창(지금의 [[어저우]] 시)[* 역사적으로 유명한 우창 시는 현재 주변 도시들과 합쳐져 [[우한]]시의 한 구역으로 되어 있다. 어저우는 우한으로부터는 동남쪽으로 40km 정도 떨어져 있다.]에 천도했지만 곧 건업으로 돌아왔다. 태평어람에 따르면 건업 서북쪽 경계에 구덩이가 있었는데 오나라 사람들은 다 시황제의 일화를 오나라 창건을 예언한 일화로 여겼다. 항우와 유방을 예언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 뒤 오나라를 멸하고 진나라([[서진]])가 삼국을 통일했으나, 이후 진나라는 [[팔왕의 난]]으로 대혼란에 빠졌다. 결국 [[흉노]] 출신의 [[유연]](劉淵)이 세운 한(漢)나라, 곧 [[전조]]에 의해 수도 [[낙양]]이 함락당하고 중국 북부를 빼앗겼다는 소식([[영가의 난]])이 건업에 있던 낭야왕 [[진원제|사마예]](司馬睿-동진(東晉)의 초대 황제)에게 전해진 직후 휘하 심복들과 호족들의 뜻을 모아 그가 건업에서 즉위한다. 이 시기부터 훗날 [[동진]]으로 분류한다. 원제(元帝-사마예)는 서진의 마지막 황제였던 민제(愍帝) 사마업(司馬鄴)의 휘(이름)인 [[업]](鄴)이 건업(建業)의 업과 음이 같다해서 [[피휘|이를 피하기 위해]] 건강(建康)이란 지명으로 고쳤다.[* 태평어람에 기재된 [[동진]]의 역사가 [[손성]]의 의견에 따르면 시황제로부터 손권이 황제에 오르기까지는 437년이고, 진나라가 (위나라의 토덕을 이어) 오행 중 금(金)의 덕을 이었으니 금릉의 기운이라는 것은 이것을 말하며, ([[진원제]] 사마예가 동진을 세운 것이 이때로부터) 526년이니 이 말이 맞다고 했다.] 이렇게 손오(229~280) 이래 건강은 [[동진]]東晋(317~420)·[[송(육조)|송宋]](420~479)·[[제(육조)|제齊]](479~502), [[양(육조)|양梁]](502~557)·[[진(육조)|진陳]](557~589)의 [[위진남북조 시대]] 남조의 한족 '''여섯 왕조'''의 수도로 340여 년간 번영했다. '''이른바 [[육조시대]]의 무대.''' [[당(통일왕조)|당]] 시대에는 다시 금릉(金陵)으로 불렸고 [[오대십국시대]]에는 강남에 세워진 지방 정권 [[오나라]]와 [[남당]]의 수도였다. 이후에는 [[강남(중국)|강남]]으로 쫓겨난 [[남송]]이 건강이 아닌 임안([[항저우시|항저우]])을 수도로 삼았다. 이유는 금나라와의 경계인 회하와 너무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금릉이라는 지명은 [[송나라]], [[원나라]] 시대까지 계속 쓰였고, 원 문종대에 이르러 다시 집경(集慶)으로 개칭되었다. 손오가 천도하면서 건업성을 축조하였는데, 다른 중국의 도성들보다도 군사적인 요건을 많이 고려한 도성으로 손꼽힌다. 건업성 자체가 손오부터 동진, 송, 제, 양, 진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남조 시기의 성벽을 통해서 손오 시기의 도성의 범위를 추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건강실록"에 기재된 손오 시기와 남조 시기 모두 "도성의 둘레는 20리 19보, 궁성의 둘레는 8리였다."라는 기록을 통해서 초축된 건강성을 연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손오 시기에는 "흙과 대나무를 둘러 성벽을 만들었다"라 되어 있었는데 동진과 남제를 거치우면서 벽돌을 사용한 성벽으로 개축되었다고 전한다. 실제로 [[어저우]]에 남아 있는 무창성 성벽도 토성이다.] 도시개발이 많이 이루어진 탓에 발굴조사된 유적이 많지 않으나 대체로 지금의 난징 친화이취(秦淮區) 일대에 위치하였다는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고 있다. 성곽 자체는 수문제 [[양견]]이 천하통일을 이루면서 강남지역의 흥기를 막고자 완전히 평지로 만드는 바람에 현재는 지표 상에 남아있는 손오~남조시기의 도성 유적은 없으며, 발굴조사를 통해서만 성벽의 기초부가 확인되고 있는 실정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