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난징시 (문단 편집) === 근대 === [[파일:Nanjing_Presidential_Building_0.jpg|width=700]] [[태평천국]], [[중화민국]]의 정부 청사이던 [[난징 총통부]] [[19세기]]에 들어오면 열강에 의해 [[청나라]]가 수난을 겪는 [[아편전쟁]]과 [[난징 조약]]의 배경이 되어 급격한 근대화를 맞이하기도 했다. 1853년 사이비 기독교 성격의 사회운동인 [[태평천국]] 운동의 지도자 [[홍수전]]이 이곳에 들어와 수도로 삼고 천왕이 되어 이름을 천경(天京)이라 하였다. 하지만 10여 년 뒤 청나라의 공격과 내분으로 인해서 곧 처참하게 함락되었다. [[신해혁명]]을 통해 수립된 [[중화민국]]도 이곳에서 처음 도읍을 정했고[* 그러나 [[위안스카이]]와 [[북양군벌]]의 영향력이 커 실질적인 수도는 베이징이었다.] [[1928년]]에는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가 되어, 직할시로 지정되었다. 이 당시 하위 행정구역은 제1구~제15구, 성북동구나 성동구 같은 명칭은 별칭이었다. 강남 지역의 막대한 경제적 영향력을 감안하면 난징을 수도로 정하는 것은 중화민국으로서 당연한 수순이었다. 국민당의 북벌은 '''역사상 두 번째로 강남에서 시작한 통일이었으며,''' 베이징은 다시 한번 수도에서 강등되어 북쪽을 평정했다는 뜻의 베이핑(北平)으로 개칭되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수도인 난징은 일본군의 최우선 목표가 되었다. 그리고 치열한 접전 끝에 결국 패색이 짙어진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후퇴하면서 결국 난징은 함락되었다. 엄청난 접전을 뚫고 오면서 악에 받친 일본군들에 의해 [[1937년]] [[중일전쟁]] 시기 최악의 대학살극인 [[난징대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일본 제국]]의 괴뢰국인 [[왕징웨이 정권]]이 들어서면서 괴뢰정권의 수도가 되기도 했다. 1945년 [[중일전쟁]]에서 승리한 [[중화민국 국민정부|국민정부]]는 난징으로 복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