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성씨) (문단 편집) == 유래 == 시조 남민은 원래 [[현종(당)|당현종]](唐玄宗) 때 [[형주]][[자사(관직)|자사]](荆州刺史)와 [[이조판서|이부상서]](吏部尙書), 금자광록대부 문하성좌시중(門下省左侍中)을 지낸 김충(金忠)이다. 755년(당나라 [[천보(연호)|천보]] 14년)에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현종(玄宗)이 [[쓰촨성|촉]](蜀)으로 행차할 때에 시종하였다. 이후 당나라의 안렴사(按廉使)로서 원병(援兵)을 청하러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태풍을 만나 경상북도 영덕(盈德)의 죽도(竹島) 혹은 축산도(丑山島)에 표류하게 되었는데, 신라에서 살기를 원하였다. 이에 경덕왕이 이러한 사실을 당현종에게 알리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현종은 "십생구사지신(十生九死之臣)을 신례(臣禮)로 부를 수 없으니 소원(所願)대로 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 후 [[경덕왕]]은 그가 [[허난성|예주]]의 [[여남]](汝南)에서 왔다고 하여 남씨(南氏)를 내리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으며 영양현(英陽縣)을 식읍으로 내렸다. 이로써 남씨(南氏)의 시조가 되었다. 다만 당대의 기록상 김충(金忠)이라는 인물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 안렴사(按廉使)라는 관직이 고려시대에 이르러서야 등장한다는 점, 안사의 난을 전후로 청병을 위해 당에서 일본으로 사절을 파견한 바가 없는 점을 보았을 때 남민(南敏)과 관련된 기록은 곧이곧대로 믿기 힘든 부분들이 많다. 한편, 지금까지 발견한 사료들을 통틀어 놓고 보았을 때 한반도에서 최초의 남씨 성을 가졌던 것으로 확인된 인물은 다름아닌 고구려 유민인 남단덕(南單德)[* 699년 평양성에서 태어나 요동에서 자랐다고 한다.]이다. 묘지명에서 전하는 바로는 "요동(고구려) 자제들을 나누어서 당의 군현에 분산 거주시켰다. (남단덕 가문은) 고구려 자제 중 으뜸이어서 안동도호부에 배치 거주했고, 조부인 남적(南狄)은 당의 마미주(磨米州) 도독을 역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미주, 즉 마미성은 고구려 요동 지역에 있던 성으로서 남단덕 가문은 아마도 마미성의 성주였을 것이다. 과거 전근대에 걸쳐 소중화 사상과 숭화 사상이 만연했음을 감안하면 남씨 성을 가진 고구려인이 중화인(中華人)의 후예를 참칭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