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경(고려) (문단 편집) == 역사 == 본래 이 지역은 [[양주시/역사|양주목]](楊州牧)에 속하였으나, 문종 때에 한양천도론이 거론되면서 양주목을 남경으로 승격하여 고려의 삼경(三京) 중 하나가 되었다. 문종은 [[남경 별궁|남경에 별궁을 짓고]] 천도를 준비했으나 흐지부지되었고, 몇 년 뒤 남경이 폐지되어 다시 양주목에 속했다가, [[숙종(고려)|숙종]] 때에 다시 설치되었다. [[원 간섭기]]가 시작되면서 [[제후국]]은 천자국에서만 쓸 수 있는 [[경(행정구역)|경]](京)을 쓸 수 없다고 하여 [[1304년]]([[충렬왕]] 34년)에 모두 [[신라]] 때의 옛 이름을 살려 [[개경]](開京)은 개성부(開城府)로, [[서경(고려)|서경]](西京)은 평양부(平壤府)로, 동경(東京)은 계림부(鷄林府)로, 남경은 한양부(漢陽府)로 일제히 격하되었다. [[1356년]] [[기철]]을 죽이고 반원 개혁에 나선 [[공민왕]]은 남경(한양)으로의 [[천도]]를 추진했으나 흐지부지되었다. 남경 천도론은 이후로도 빈번하게 일어나 [[우왕]] 때인 [[1382년]](우왕 8년)에 실제로 천도했으나, 이듬해 개경으로 복귀했다. [[1390년]] [[공양왕]]도 잠시 천도했다가 이듬해에 개경으로 복귀했다. 고려 말기에 벌어진 천도 움직임은 이후 조선 초 한양 천도에 영향을 주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로 [[태조(조선)|태조]]는 전 왕조의 색채가 강하게 남은 개성을 떠나고 싶어 했고, 조정에 새 수도 후보지를 올리라 명한다. 처음에는 [[계룡산]](지금의 [[충청남도]] [[계룡시]] 신도안면)으로 정해졌으나, 경기도관찰사 [[하륜]]은 계룡산 땅이 너무 좁고 근처에 큰 물이 없어 도읍으로는 적절치 않다고 하며 한양 땅을 추천하였고, 한양부가 새 수도로 낙점되어 [[1394년]] [[11월 21일]]에 천도를 단행하였다. 그 이듬해인 [[1395년]] [[6월 6일]]에는 한양부를 옛 수도였던 개성부의 전례에 따라 [[한성부]](漢城府)로 개칭하면서 옛 양주를 한양에서 분리시키며 [[한양도성]] 바깥에 있는 지역은 [[고양군]]과 [[양주군]]으로 편입시켰다. 현 [[용산구]] [[둔지산]]을 경계로 서쪽은 [[고양군]]에, 동쪽은 [[양주군]]이 되었고[* 하지만 이들 지역 중 사대문 주변 지역은 세종대에 한성부 [[성저십리]]로 편입되었다. 그럼에도 조선 후기 이전에는 해당 성저십리 주민들은 조세를 한성부가 아닌 원 소속 군현(고양, 양주)에 납부해야 했던 등 애매한 부분은 있었다고 한다.], 양주군 관아는 지금의 [[광진구]] [[광장동]] 일대에 두었다. [[태종(조선)|태종]] 시절까지는 옛 개성부를 가리키던 말인 [[개경]]에서 따와 한경(漢京)이라고도 불렸다. [[분류:한국의 옛 수도]][[분류:서울특별시의 역사]][[분류:고려의 행정구역]][[분류:문종(고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남경, version=8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