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덕우 (문단 편집) === 재무부 장관-경제 부총리 ===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130520125130103011.jpg|width=450]] 경제학 교수를 지내는동안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편성 평가단에 속하면서 각종 정부정책 관련 회의에 참석해 비판적인 발언을 많이 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주목을받아 1969년 재무부 장관에 임명되어 관료 경력을 시작하였는데 임명장을 받고 나가는 그에게 대통령이 한마디 던졌다. “남 교수, 그동안 정부가 하는 일에 비판을 많이 하던데 이제 맛 좀 봐!” 훗날 회고하기를 자기 딴에는 정부 시책에 온건하고 건설적인 비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라고 느껴졌다. 어쨌든 그 후 14년 동안 정부 관료의 쓴맛, 단맛을 톡톡히 봤다”고 돌아보았다고 한다. 1969년 [[기획재정부|재무부]] 장관에 임명되어 [[관료]] 경력을 시작하였다. 1974년 9월 개각에서는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에 임명되어 이후 4년간 재직했다. 말하자면 1970년대 한국 경제정책의 실질적인 관료 수장이었던 셈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겠다는 구상을 전격 발표했다. 재원 마련은 남덕우 재무부 장관의 몫이었다. 그는 금융시장을 왜곡하지 않는 정책자금 조달 방안을 고심한 끝에 국민투자기금을 만든다. 이 기금을 통해 23조원의 자금이 중화학공업에 투입됐다. 부총리로서는 해외 순방하면서 112억원의 외자를 조달해 경제개발을 뒷받침했다. 1974년 9월 개각에서는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에 임명되어 이후 4년간 재직했다. 재임시엔 원유 도입값이 3배 이상 폭등하여 한국경제는 부도직전에 내몰렸던 [[오일쇼크]] 극복과 중화학공업 육성 , 수출 100억달러 [[부가가치세]] 도입을 주도하였으며 최장수 재무장관(4년11개월), 최장수 경제부총리(4년3개월) 타이틀을 지녔다. 그러나 1978년 [[부가가치세]] 도입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 해 치러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이 부가세 철폐를 내세운 신민당에 득표율이 1.1% 뒤쳐지는 결과로 나타나 이에 충격을 받은 [[민주공화당|공화당]]은 부가세도입을 주도한 경제관료들에 대한 책임론을 들고나와 [[김정렴]] 비서실장과 함께 12월 개각으로 경질되었고, 후임 [[경제부총리]]에는 [[신현확]]이 임명되었다. 1979년 1월 대통령 경제특보로 임명되었다가 [[10.26 사태]]이후 12월에 물러났다. 경제부총리로서 1970년대경제 정책을 주도한 행적으로 그는 1960년대 초기의 [[장기영(1916)|장기영]], 1960년대 말~70년대 초기의 [[김학렬]]과 더불어 박정희 시대 한국의 경제건설기를 대표하는 경제관료로 평가받는다. 이 당시 [[시사 만화가]] [[김성환(만화가)|김성환]] 화백은 [[고바우 영감]]에서 경제부총리 남덕우를 이렇게 풍자했다. >남: 남의 돈을 >덕: 떡 주무르듯 >우: 우롱하는[* 이상하게 이 부분은 '''우물주물'''로 알려져 있다.] 사람이 아닌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