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방작전 (문단 편집) === [[네덜란드령 동인도]]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79px-Pacific_War_-_Dutch_East_Indies_1941-42_-_Map.jpg|width=300]] || 서쪽의 수마트라 섬에서 시작해 동쪽의 뉴기니 섬으로 끝나는 남방작전 최대의 하이라이트지만, 워낙 수비하는 네덜란드군의 병력이 적어 큰 전투는 거의 일어나지 않고 일본군에 의한 일방적인 공격과 점령의 연속이었다. 동인도제도 최초의 공격은 12월 15일, [[브루나이]] 상륙으로 시작되었다. 영국령이었던 사라와크(북보르네오)에 가해진 일본군의 상륙은 당연히 유전지대의 확보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는데, 영국군의 방어가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어 북보르네오의 일본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목표를 점령했다. 24일에는 쿠칭이 함락되었고, 1월 11일에는 네덜란드령 남보르네오의 타라칸에도 일본군이 상륙했다. 이후 24일에 발릭파판이, 2월 10일에 반자르마신이 함락되면서 보르네오 섬은 일본군의 손에 떨어졌다. 이 와중에 발릭파판 앞에서 미군 구축함전대가 일본 수송함대를 기습하는데 성공, 수송함 3척을 격침시키는 데 성공하여 개전 후 첫 승전으로 미국 전역에 보도되었다.(미:마카사르 해협 해전/일:발릭파판 해전) 그런데 이때 격침된 수송선들은 빈 배였다. 보르네오 섬 동쪽의 셀레베스 섬에도 공격이 이루어졌는데, 섬 북단 메나도에 가해진 공격은 상륙전이 아닌 일본군 공수부대에 의한 공중강습으로 태평양 전역 최초의 공수작전이었다.[[http://bemil.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2/04/2014120402840.html|#]][[http://bemil.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2/04/2014120402910.html|#]] 1월 11일, 해군육전대 공수부대에 의해 메나도 비행장에 일본군 공수부대 1개 대대가 투입되었다. 네덜란드군 수비대는 거세게 저항했으나 공수부대에 의한 공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덕분에 일본군을 몰아내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다음날 2차 공수작전, 그리고 첫 공수작전과 동시에 개시된 상륙작전 등으로 일본군의 증원이 연거푸 오자 결국 패퇴, 항복하고 말았다. 어쨌든 메나도를 무사히 점령하는데 성공했고, 이를 발판으로 2월에 티모르 섬과 발리 섬을 공격했다. 티모르 섬에서는 다시 공수부대가 투입되었고, 이 와중에 일본은 중립국이었던 포르투갈령 티모르를 무단으로 침공, 영토사용권을 강제로 얻어냈다. 티모르 침공에 대한 연합국의 공격을 우려한 대본영은 2월 19일, 호주 북단의 포트 다윈을 연합함대를 동원해 폭격하여 남부의 위협을 제거했다. 한편, [[말레이 해전]] 승리로 제해권을 쥔 일본군은 수마트라 섬 최대의 유전지대인 팔렘방을 공격했다. 2월 14일, 일본 육군 공수부대인 제1정진단이 우선 투입되어 비행장과 유전 지대를 공격했다. 이를 막는 방어군은 3,000여 명인데 그중 절반이 현지인 부대로 제대로 된 전력이라 하기에 어려웠고, 나머지 병력 중 1천여 명은 급파된 호주군 병력이라 현지 지리를 잘 몰랐다. 결국 일본군은 이틀에 걸친 공수작전으로 비행장을 뒤이은 육군 상륙부대의 지원으로 유전과 정유시설까지 확보, 동남아 최대의 유전 및 정유시설을 얻을 수 있었다. 여기서 메나도 공수전에 투입된 병력은 해군육전대 요코스카지대, 팔렘방 공수전에 투입된 병력은 육군 제1정진단으로 각각 소속이 다른데 이는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에 기인한 병림픽의 결과로 서로 자존심싸움 때문에 각각의 공수부대를 운용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남은 것은 자바 섬뿐이었다. 자바 섬 상륙을 막기 위해 ABDA 연합함대가 출격, 2월 27일 일본군 수송선단을 포착하여 공격했으나 일본군 함대가 우루루 몰려오면서 오히려 역관광, 압도적인 전력차 속에서 분전했으나 네덜란드 경순양함 데 로이테르와 자바, 네덜란드 구축함 코르테놀, 영국 구축함 엘렉트라와 주피터가 격침당했고 데 로이테르에 승선하고 있던 연합함대 사령관 카렐 도르만이 전사했다.(제1차 자바 해전) 뒤이어 2월 28일에서 3월 1일에 걸쳐 후퇴하려던 연합군 함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미국 중순양함 휴스턴, 오스트레일리아 경순양함 퍼스, 네덜란드 구축함 에베르첸이 격침당했다.(순다 해협 해전) 3월 1일 오후, 살아남은 잔존함정에 대한 공격까지 이루어져 영국군 중순양함 엑스터와 구축함 엔카운터가 격침되었고 후퇴하던 미국 구축함 포프도 결국 격침당했다.(제2차 자바 해전) 이를 모두 합쳐서 [[자바 해전]]이라고 통칭한다. 이렇게 연합군 함대가 완전히 괴멸되는 틈을 타 일본군은 2월 27일과 28일에 걸쳐 자바 섬의 동서 양쪽에 상륙했다. 동쪽에 48사단, 서쪽에 2사단, 그리고 각 사단을 지원하는 지원부대까지 대대적으로 상륙시킨 일본군은 말레이에서 그랬던 것처럼 [[은륜 부대]](자전거 부대)와 [[치하]]를 투입해 신속하게 진격했다. 물론 이 시점까지 자바 섬에는 연합군이 10만여명 정도 남은 상태였으나, 병력 중 절반이 네덜란드를 위해서는 별로 싸울 생각이 없는 인도네시아 현지주민 민병대였고, 사실상 저항능력과 의지를 상실한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는 지상에서의 저항조차 제대로 못했다. 결국 최후의 거점인 반둥에 집중포화를 얻어맞은 후인 3월 8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는 항복을 선언했다. 이후 일본군의 공격은 뉴기니 접수로 이어졌고, 뉴기니 침공은 1942년 이후 남태평양 전역의 원인이 된다. 번외 이야기로 이 당시 기가 막힌 방법으로 탈출한 네덜란드 함선이 있다. 소해정인 아브라함 크리인센(HNLMS Abraham Crijnssen)은 자바 함락 직후 다른 연합군 함대와 함께 자바에서 탈출하려 했다. 탈출은 상당히 어려웠는데 이미 자매함인 HNLMS Pieter De Bitter는 3월 2일 수라바야에서 일본군에게 노획당했고, 역시 또다른 자매함인 HNLMS Eland Dubois과 Van Amstel 또한 3월 8일 격침당했다. 이 때문에 아브라함 크리인센 호는 특별한 방법을 써야 했는데, 바로 배를 섬처럼 위장하는 것이었다. 육지의 나무와 풀을 가져다가 배에 빽빽하게 심어서 가까이 접근해도 선박인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크리인센은 자바를 탈출하는데 성공한 마지막 함선이 될 수 있었고, 3월 20일 오스트레일리아의 프리맨틀(Fremantle)에 도착했다. 도착 후엔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태평양 전쟁 종전 후 네덜란드로 복귀, 1960년에 퇴역했다.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44&pn=0&num=103056|해당 함선의 모습]]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