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방작전 (문단 편집) == 배경 == 전반적 배경은 [[태평양 전쟁/배경|진주만 공습의 원인]]과 일맥상통한다. [[중일전쟁]]이 길어지며 물자난은 가중되었는데, [[ABCD 포위망]]으로 전쟁에 필수적인 전략자원인 [[석유]] 수급이 어려워진 일본의 입장에서는 석유, [[고무]]와 같은 핵심 전략자원 확보를 위해 서구열강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를 기필코 획득해야 했다. 사실 [[진주만 공습]]은 남방작전을 위한 과정에 불과했지 목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목적인 남방작전보다 과정인 진주만 공습이 더 중요시된 이유는 일본의 동남아 점령을 막을 유일한 군사적 위협이 미 태평양 함대뿐이었다는 데에 기인했다. 1941년, 동남아의 유럽 세력은 실로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프랑스 식민정부는 [[프랑스 침공]]으로 본국 정부가 [[독일]]에 항복한 뒤라서 일본군의 인도차이나 진주를 막을 세가 없었고, [[비시 프랑스]]는 결국 이를 허용할 수밖에 없어 인도차이나 전역이 명목만 프랑스령인 사실상 일본령이 되어버렸다. [[네덜란드]]도 본토가 독일에 점령당한 상태였고, [[버마]]와 [[말레이시아]]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도 힘겹게 본토를 방어하면서 동시에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국]] 세력과 싸우는 중이었다. [[미국]]의 [[필리핀]] 주둔군이 가장 큰 난관이었으나, 태평양 함대만 격파한다면 제해권 없는 미군이 필리핀을 방어해내긴 어려웠다. [[마카오]]와 [[동티모르]]의 [[포르투갈]] 세력은 중립국으로서 무기나 팔며 전쟁을 구경하고 있었다. 본토가 아예 점령당한 프랑스나 네덜란드보다는 낫긴 하였지만, 굳이 고려 대상이 아닐 정도로 그 세력이 미미했다. 일본으로서는 어떻게든 [[동남아시아 전역]]을 확보해서 [[대동아 공영권]]을 완성시키는 것을 전략적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일본은 유럽전선에 휩쓸린 서구열강들이 프랑스처럼 식민지를 포기할 것이라 기대했고[* 그런데 사실 비시 프랑스조차 인도차이나 식민지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상황이 안 좋으니 일본군의 진주를 허용했을 뿐이지 전쟁이 끝나면 독일을 등에 업고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을 도로 몰아내겠다는 것이 비시 정부의 복안이었다. 실제로 비시 프랑스가 임명한 인도차이나 총독은 비시 프랑스가 망한 1945년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물론 [[허수아비(동음이의어)#s-2.1|허수아비]]긴 했다.] 아울러 동남아시아만 모조리 장악하면 고립된 중국이 알아서 항복할 것이라 착각했다. 대본영은 진주만 공습이 성공한다는 전제하에 서태평양과 동남아시아를 모조리 석권하는 치밀한 전략 계획과 타임 테이블을 수립하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